대만 타이샨마을의 메이닝공방에 수작업으로 만들어낸 각종 옷을 입은 바비인형이 전시돼 있다.
1960년대 OEM기지로 번성
1987년 중국 이전 뒤 쇠락
정부, 인형패션 중심지 육성
‘대만의 아이콘’으로 부상 “우와~”. 지난주 찾은 대만 수도 타이베이 남부에 있는 타이샨의 메이닝 공방에 들어서니 먼저 감탄사부터 나왔다. 사방에는 초기 바비인형과 전세계 각국의 옷을 입은 인형은 물론, 장제스 전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 등 ‘퍼스트 레이디’ 시리즈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는 슬픈 이야기다. 타이샨은 전세계 여자 아이들의 ‘소꼽친구’인 바비인형의 제2의 고향. 1966년 미국 마텔은 바비인형의 전세계 주문자생산방식(OEM) 기지 ‘메이닝 공장’을 이곳에 세웠다. 인형공장뿐 아니라 관련 산업들도 몰려들며, 지역 인구 절반 이상인 1만여명이 관련 업체에 종사하게 됐다. 농업 위주의 산업구조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하던 당시 대만의 상징으로, 타이샨은 대만에서도 가장 잘사는 마을이 됐다. 타이샨마을협동연합의 매니저 구차이라는 “공장이 있던 당시엔 대만 전국에서 이곳으로 일을 하러 왔다. 메이닝 공장 유니폼을 입은 여성들은 자부심이 대단했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 결혼한 이들은 ‘메이닝 커플’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도 1987년까지 이야기다. 그해, 마텔은 더 싼 임금을 찾아 갑자기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겼다. 1970년대부터 국제 무대 곳곳에서 중국에 밀려나기 시작하던 대만의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마을에겐 파산을 의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다시 인형에서 나왔다. 10여년동안 쇠락의 길을 걷던 이들은 1990년대 말부터 지역의 교사, 언론, 봉사자들과 수많은 세미나 및 워크숍을 하며 그들을 버렸던 ‘바비’로 다시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구차이라는 “1998년 교육부가 ‘평생학습의 해’를 선포하며 창조적인 마을 프로젝트를 찾을 때 선정된 5개 사업중 하나로 선택된 게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2004년엔 대만의 유명 디자이너 19명이 마을 사람들에게 인형 옷 디자인을 가르치게 됐고 마침내 2008년 메이닝 공방이란 이름으로 인형 옷을 생산하는 공동체 업체가 탄생한다. 그동안 마텔로부터 바비인형의 사용권을 얻어 중국의 전통옷 등을 입히던 이들은 지난해엔 ‘메이닝 인형’이란 독자 인형까지 런칭했다. 메이닝 인형은 전세계 전시회 등에 ‘대만 패션대표’ 역할까지 하게 됐다. 노동부 ‘고용다양성 진흥 프로그램’ 의 지원을 받는 메이닝 공방에서 일하는 이들은 전부 빈곤층 여성들이다. 2000년대 초 지진이 집중돼 마을들이 무너지고, 실업률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노동부는 시민단체와 연계해 저소득층·실업자 고용 등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그램을 꾸려 9만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작업실에서 중국고전 책을 들춰가며 인형옷을 만들던 한 여성은 “매니저들과 노동자들은 매주 일터의 고충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기회의를 연다”고 소개했다. 빵집에선 바비케이크를, 레스토랑에선 바비아이스를 팔기도 하며, 타이샨은 관광객까지 끌어들이게 됐다. 1960년대 전성기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몰라도, 이제 이들은 ‘세계 인형 패션 중심지’를 꿈꾸기 시작했다. 타이샨(대만)/글·사진 김영희 기자
엄마-아빠, 누구의 성? 18살때 아이 스스로 선택 대만 양성평등 정책 지난해 대만의 여성 노동참여율은 49.89%로 처음으로 절반에 육박하게 됐다. 유엔개발프로그램(UNDP)이 조사한 2010년 양성평등지수에서 대만은 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에 이어 4위(한국은 21위)를 차지했다. 활발한 여성 사회진출을 보여주는 지표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빈약한 보육시스템 등을 반영하듯, 대만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의 수는 0.94명으로 전세계 최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 몇년 전부터 대만 정부는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즉 양성평등을 정책 화두로 잡기 시작했다. 정부 부처뿐 아니라 대학 등 각 단위에서 꾸려진 위원회는 ‘적어도 모든 성이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도록 규정돼 있고, 정기적으로 관련 사업의 추진상황을 보고하게 돼 있다. 지난주 대만 정부는 이런 성과를 알리기 위해 전세계 8개국 12명의 기자 및 여성단체 대표들을 초청했다. 문제가 발견될 경우 신속하게 고쳐나가는 것과 엔지오 및 자원봉사자들과 깊게 연계한 정책 구사, 타이샨의 사례처럼 중소기업 중심의 대만 산업구조에 맞는 다양한 작은 프로그램 지원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2000년 제정한 ‘여성 건강 정책’이 여성의 출산능력 향상에만 초점 맞췄다는 비판이 일자 2007년 성 인지적 관점을 지닌 대대적인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2008년부터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했는데, 지난해엔 아이들이 18살이 됐을 때 스스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확대했다. 변화는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타이베이 9개 시립병원엔 여성들이 원스톱으로 모든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시설들이 마련됐다. 과거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반복해 진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가정폭력 신고의무제’‘원스톱 조사시스템’이 마련되면서, 병원은 환자에게서 가정폭력 피해가 의심될 경우 의무적으로 신고를 하고 경찰·검찰 등이 직접 찾아와 한번에 진술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급속한 변화에 대해 대만 페미니스트 학자 연합의 대표인 장주에 교수는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그동안 억눌려왔던 사회 각계층의 요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며 이런 운동의 힘이 밑바탕이 됐다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 및 차별 문제, 강고한 직장내 ‘유리천장’ 등 과제는 산적해있다. 노동부 장관인 왕주샨은 “쉽게 얻어지진 않는다. 싸우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타이베이/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1987년 중국 이전 뒤 쇠락
정부, 인형패션 중심지 육성
‘대만의 아이콘’으로 부상 “우와~”. 지난주 찾은 대만 수도 타이베이 남부에 있는 타이샨의 메이닝 공방에 들어서니 먼저 감탄사부터 나왔다. 사방에는 초기 바비인형과 전세계 각국의 옷을 입은 인형은 물론, 장제스 전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 등 ‘퍼스트 레이디’ 시리즈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는 슬픈 이야기다. 타이샨은 전세계 여자 아이들의 ‘소꼽친구’인 바비인형의 제2의 고향. 1966년 미국 마텔은 바비인형의 전세계 주문자생산방식(OEM) 기지 ‘메이닝 공장’을 이곳에 세웠다. 인형공장뿐 아니라 관련 산업들도 몰려들며, 지역 인구 절반 이상인 1만여명이 관련 업체에 종사하게 됐다. 농업 위주의 산업구조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하던 당시 대만의 상징으로, 타이샨은 대만에서도 가장 잘사는 마을이 됐다. 타이샨마을협동연합의 매니저 구차이라는 “공장이 있던 당시엔 대만 전국에서 이곳으로 일을 하러 왔다. 메이닝 공장 유니폼을 입은 여성들은 자부심이 대단했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 결혼한 이들은 ‘메이닝 커플’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도 1987년까지 이야기다. 그해, 마텔은 더 싼 임금을 찾아 갑자기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겼다. 1970년대부터 국제 무대 곳곳에서 중국에 밀려나기 시작하던 대만의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마을에겐 파산을 의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다시 인형에서 나왔다. 10여년동안 쇠락의 길을 걷던 이들은 1990년대 말부터 지역의 교사, 언론, 봉사자들과 수많은 세미나 및 워크숍을 하며 그들을 버렸던 ‘바비’로 다시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구차이라는 “1998년 교육부가 ‘평생학습의 해’를 선포하며 창조적인 마을 프로젝트를 찾을 때 선정된 5개 사업중 하나로 선택된 게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2004년엔 대만의 유명 디자이너 19명이 마을 사람들에게 인형 옷 디자인을 가르치게 됐고 마침내 2008년 메이닝 공방이란 이름으로 인형 옷을 생산하는 공동체 업체가 탄생한다. 그동안 마텔로부터 바비인형의 사용권을 얻어 중국의 전통옷 등을 입히던 이들은 지난해엔 ‘메이닝 인형’이란 독자 인형까지 런칭했다. 메이닝 인형은 전세계 전시회 등에 ‘대만 패션대표’ 역할까지 하게 됐다. 노동부 ‘고용다양성 진흥 프로그램’ 의 지원을 받는 메이닝 공방에서 일하는 이들은 전부 빈곤층 여성들이다. 2000년대 초 지진이 집중돼 마을들이 무너지고, 실업률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노동부는 시민단체와 연계해 저소득층·실업자 고용 등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그램을 꾸려 9만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작업실에서 중국고전 책을 들춰가며 인형옷을 만들던 한 여성은 “매니저들과 노동자들은 매주 일터의 고충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기회의를 연다”고 소개했다. 빵집에선 바비케이크를, 레스토랑에선 바비아이스를 팔기도 하며, 타이샨은 관광객까지 끌어들이게 됐다. 1960년대 전성기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몰라도, 이제 이들은 ‘세계 인형 패션 중심지’를 꿈꾸기 시작했다. 타이샨(대만)/글·사진 김영희 기자
엄마-아빠, 누구의 성? 18살때 아이 스스로 선택 대만 양성평등 정책 지난해 대만의 여성 노동참여율은 49.89%로 처음으로 절반에 육박하게 됐다. 유엔개발프로그램(UNDP)이 조사한 2010년 양성평등지수에서 대만은 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에 이어 4위(한국은 21위)를 차지했다. 활발한 여성 사회진출을 보여주는 지표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빈약한 보육시스템 등을 반영하듯, 대만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의 수는 0.94명으로 전세계 최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 몇년 전부터 대만 정부는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즉 양성평등을 정책 화두로 잡기 시작했다. 정부 부처뿐 아니라 대학 등 각 단위에서 꾸려진 위원회는 ‘적어도 모든 성이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도록 규정돼 있고, 정기적으로 관련 사업의 추진상황을 보고하게 돼 있다. 지난주 대만 정부는 이런 성과를 알리기 위해 전세계 8개국 12명의 기자 및 여성단체 대표들을 초청했다. 문제가 발견될 경우 신속하게 고쳐나가는 것과 엔지오 및 자원봉사자들과 깊게 연계한 정책 구사, 타이샨의 사례처럼 중소기업 중심의 대만 산업구조에 맞는 다양한 작은 프로그램 지원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2000년 제정한 ‘여성 건강 정책’이 여성의 출산능력 향상에만 초점 맞췄다는 비판이 일자 2007년 성 인지적 관점을 지닌 대대적인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2008년부터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했는데, 지난해엔 아이들이 18살이 됐을 때 스스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확대했다. 변화는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타이베이 9개 시립병원엔 여성들이 원스톱으로 모든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시설들이 마련됐다. 과거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반복해 진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가정폭력 신고의무제’‘원스톱 조사시스템’이 마련되면서, 병원은 환자에게서 가정폭력 피해가 의심될 경우 의무적으로 신고를 하고 경찰·검찰 등이 직접 찾아와 한번에 진술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급속한 변화에 대해 대만 페미니스트 학자 연합의 대표인 장주에 교수는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그동안 억눌려왔던 사회 각계층의 요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며 이런 운동의 힘이 밑바탕이 됐다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 및 차별 문제, 강고한 직장내 ‘유리천장’ 등 과제는 산적해있다. 노동부 장관인 왕주샨은 “쉽게 얻어지진 않는다. 싸우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타이베이/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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