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원 작가.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짬] 올드상하이 ‘탐험기’ 낸 박규원 작가
“지난 20여년 동안 내가 모르던 세계를 알게 되면서 나 자신도 알게 되었죠.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열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작은 외할아버지 덕분이죠.”
최근 <아주 특별한 올드 상하이>란 책을 펴낸 박규원(62)씨 얘기다. 1994년 어머니 사진첩에서 본 작은 외할아버지 사진이 그 출발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 영화계에 우뚝 솟았던 배우 김염(1910~83, 본명 김덕린)이 어머니의 삼촌이라니? 이화여대 미대 졸업 뒤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박씨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열정이 기지개를 켰다. 그 결과물이 김염의 일대기 <상하이 올드데이스>다. 그는 이 글로 2003년 민음사 주최 논픽션 공모 대상을 받았다. 이번엔 1930년대 상하이란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았다. 그를 24일 서울 방이동 자택에서 만났다.
작은 외조부 김염 일대기 이어
30년대 상하이 소개 책 펴내
“94년 이후 20여년 ‘탐험’ 결과
일대기 중국판 1만부 이상 팔려” “외조부 영화화, 이안 감독도 거론
김염만큼 멋진 배우 찾기 힘들어” 그가 탐사한 올드 상하이는 30년대 서구 열강이 중국 땅을 차지하고 들어선 조계지를 말한다. 중국의 시선에선 치욕과 수난의 흔적이지만 당시 상하이 사람들에겐 최첨단 도시 문명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만든 영화가 서양그림자극이란 이름으로 상하이에 상륙한 게 그 다음해 8월이었다. 전기와 전차 등 서양 문명의 이기가 별다른 시차 없이 직수입됐다. 30년대 영화제작사만 100여개에 달했다. 올드 상하이 최고의 남자 배우는 김염이었다. 데뷔 5년째인 22살에 찍은 <야초한화>로 그는 스타덤에 올랐다. 그 다음해인 33년 상하이 영화잡지 <전성>은 독자 투표를 통해 그에게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항목에서 3관왕의 영예를 안겼다. 박씨에게 김염에 대해 많은 걸 알려준 중국의 원로극작가 선지(그는 이달 16일 사망했다)는 김염과 같은 멋있는 배우는 김염 이전과 이후에도 없었다고 했단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배우였죠.” 실제 김염의 영화들은 이전의 통속적 오락영화와 달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이나 항일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 주류였다. 박씨는 <상하이 올드데이스>의 중국어판인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서>를 2006년 상하이에서 펴냈다. 3쇄 1만5천부를 찍었으니 꽤 반응이 있었던 셈이다. 김염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자는 얘기도 끊임없이 나오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인간 김염의 멋’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 것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리안 감독이 상하이에서 <색,계>를 촬영할 무렵 상하이 영화제작소에서 리안에게 김염 영화를 맡기자는 결정이 이뤄졌어요. 리 감독이 <색,계>에 이어 다시 항일영화를 만드는 데 부담을 느껴 성사되지는 않았어요.” 최근에도 중국의 대형 투자회사에서 김염의 부인 친이(94)에게 영화화 제안을 해왔다고 전했다. 47년 김염과 재혼한 친이도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는 배우다. 그의 이름을 딴 친이예술박물관이 2011년 상하이 푸둥공원에 세워졌다. 지난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인공까지 맡은 영화(<청해호반>)가 제작됐을 정도로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친이 할머니는 영화라는 게 수많은 사람들의 합작품이라며, 김염에 대한 영화도 여러 조건이 무르익어 최고가 되면 저절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1878~1919)은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김필순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에서 독립군 자금 마련을 위해 운영하던 병원에서 일본인 조수에게 독살돼 생을 마감한다. 고아가 된 김염은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인 고모 김순애의 집에서 자란다.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등과 함께 해방정국의 3거두로, 당시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염이 고모 집에서 영화잡지를 빌려 본 게 들통나 난리가 난 적이 있대요. 당시만 해도 배우를 광대로 취급했던 시기였지요.”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영문학 박사 김규식도 당시 영화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다는 얘기다. 김염의 톈진 난카이중 선배 저우언라이는 ‘영화황제’ 후배에게 ‘당신은 중국의 부마(공주의 남편)’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친이가 중국의 공주인 셈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김염의 중국 내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6년 전 김염 100주기 행사는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등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열렸죠. 중국영화박물관 역시 김염 전시 공간을 가장 돋보이게 꾸며놓았죠.” 상하이시가 주최한 100주년 행사 때 박씨는 아들 둘, 남편과 함께 한국 가족을 대표해 참석했다. 김염이 누구를 가장 닮았냐고 묻자, “아버지(김필순)와 할머니(안성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안성은 할머니가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올드 상하이의 어느 공간 어느 순간에 가장 가보고 싶은지 물었다. “김염과 음악가 녜얼, 감독 우융강 셋은 항상 붙어 다닌다고 해서 삼검객이라고 했대요. 그들이 중국 영화의 미래를 위해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을 직접 보고 싶어요. 세 사람의 열정에 끼고 싶어요.” 중국 3세대의 대표 감독 우융강의 데뷔작 <신녀>는 당대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김염은 친구 우융강의 성공적 데뷔를 위해 그 시대 최고의 여배우 롼링위의 출연을 주선했다. 롼링위는 그 다음해 자살로 생을 마친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30년대 상하이 소개 책 펴내
“94년 이후 20여년 ‘탐험’ 결과
일대기 중국판 1만부 이상 팔려” “외조부 영화화, 이안 감독도 거론
김염만큼 멋진 배우 찾기 힘들어” 그가 탐사한 올드 상하이는 30년대 서구 열강이 중국 땅을 차지하고 들어선 조계지를 말한다. 중국의 시선에선 치욕과 수난의 흔적이지만 당시 상하이 사람들에겐 최첨단 도시 문명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만든 영화가 서양그림자극이란 이름으로 상하이에 상륙한 게 그 다음해 8월이었다. 전기와 전차 등 서양 문명의 이기가 별다른 시차 없이 직수입됐다. 30년대 영화제작사만 100여개에 달했다. 올드 상하이 최고의 남자 배우는 김염이었다. 데뷔 5년째인 22살에 찍은 <야초한화>로 그는 스타덤에 올랐다. 그 다음해인 33년 상하이 영화잡지 <전성>은 독자 투표를 통해 그에게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항목에서 3관왕의 영예를 안겼다. 박씨에게 김염에 대해 많은 걸 알려준 중국의 원로극작가 선지(그는 이달 16일 사망했다)는 김염과 같은 멋있는 배우는 김염 이전과 이후에도 없었다고 했단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배우였죠.” 실제 김염의 영화들은 이전의 통속적 오락영화와 달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이나 항일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 주류였다. 박씨는 <상하이 올드데이스>의 중국어판인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서>를 2006년 상하이에서 펴냈다. 3쇄 1만5천부를 찍었으니 꽤 반응이 있었던 셈이다. 김염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자는 얘기도 끊임없이 나오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인간 김염의 멋’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 것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리안 감독이 상하이에서 <색,계>를 촬영할 무렵 상하이 영화제작소에서 리안에게 김염 영화를 맡기자는 결정이 이뤄졌어요. 리 감독이 <색,계>에 이어 다시 항일영화를 만드는 데 부담을 느껴 성사되지는 않았어요.” 최근에도 중국의 대형 투자회사에서 김염의 부인 친이(94)에게 영화화 제안을 해왔다고 전했다. 47년 김염과 재혼한 친이도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는 배우다. 그의 이름을 딴 친이예술박물관이 2011년 상하이 푸둥공원에 세워졌다. 지난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인공까지 맡은 영화(<청해호반>)가 제작됐을 정도로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친이 할머니는 영화라는 게 수많은 사람들의 합작품이라며, 김염에 대한 영화도 여러 조건이 무르익어 최고가 되면 저절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1878~1919)은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김필순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에서 독립군 자금 마련을 위해 운영하던 병원에서 일본인 조수에게 독살돼 생을 마감한다. 고아가 된 김염은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인 고모 김순애의 집에서 자란다.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등과 함께 해방정국의 3거두로, 당시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염이 고모 집에서 영화잡지를 빌려 본 게 들통나 난리가 난 적이 있대요. 당시만 해도 배우를 광대로 취급했던 시기였지요.”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영문학 박사 김규식도 당시 영화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다는 얘기다. 김염의 톈진 난카이중 선배 저우언라이는 ‘영화황제’ 후배에게 ‘당신은 중국의 부마(공주의 남편)’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친이가 중국의 공주인 셈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김염의 중국 내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6년 전 김염 100주기 행사는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등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열렸죠. 중국영화박물관 역시 김염 전시 공간을 가장 돋보이게 꾸며놓았죠.” 상하이시가 주최한 100주년 행사 때 박씨는 아들 둘, 남편과 함께 한국 가족을 대표해 참석했다. 김염이 누구를 가장 닮았냐고 묻자, “아버지(김필순)와 할머니(안성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안성은 할머니가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올드 상하이의 어느 공간 어느 순간에 가장 가보고 싶은지 물었다. “김염과 음악가 녜얼, 감독 우융강 셋은 항상 붙어 다닌다고 해서 삼검객이라고 했대요. 그들이 중국 영화의 미래를 위해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을 직접 보고 싶어요. 세 사람의 열정에 끼고 싶어요.” 중국 3세대의 대표 감독 우융강의 데뷔작 <신녀>는 당대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김염은 친구 우융강의 성공적 데뷔를 위해 그 시대 최고의 여배우 롼링위의 출연을 주선했다. 롼링위는 그 다음해 자살로 생을 마친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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