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살라차강 근처에서 발견된 5050~5300년 전 수렵 채집인 남성의 두개골. 남성 유골 디엔에이(DNA) 분석을 해보니 흑사병 원인균인 페스트균 감염 흔적이 나왔다. 베를린/AFP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5050~5300년 전 수렵 채집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에서 흑사병 감염 흔적이 나왔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흑사병 감염자라고 영국 <가디언> 등이 2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독일 킬 대학 벤 크라우제키오라 교수 등은 라트비아 살라차강 근처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연구해 밝혀낸 이 결과를 최근 생명과학 학술지 <셀 리포츠>에 발표했다. 라트비아 유적지에서는 젊은 여성과 아기, 남성 2명의 유골이 발굴됐다. 유골은 19세기에 한 차례 그리고 몇 년 전 다시 발굴됐다. 연구진이 발굴된 유골의 두개골과 치아에서 나온 디엔에이(DNA)를 분석해보니, 유골은 5050~5300년 전 것으로 분석됐다. 남성 한 명은 사망 당시 20~30살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현재는 멸종된 페스트균(흑사병 원인 균)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흔적이 나왔다. 크라우제키오 교수는 “현재까지는 가장 오래된 흑사병 희생자”라고 말했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이 남성이 감염된 원시 페스트균은 7200년 전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는 페스트균에서 갈라진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 시대의 페스트균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분석이 나왔다. 연구진은 남성이 감염된 페스트균에는 벼룩이 병을 옮길 수 있는 유전자가 결여되어 있다고 전했다. 중세 시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벼룩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퍼졌고, 수천만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흑사병 창궐은 당시 유럽의 봉건제를 뒤흔든 계기로 작용했다. 크라우제키오라 교수는 “아마도 그(5000여년 전 숨진 남성)는 설치류에 물려 페스트균에 감염됐고 며칠이나 일주일 정도 뒤 패혈증 쇼크로 사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석기 시대 유골에서 페스트균 감염 흔적을 발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8년 덴마크 연구진이 스웨덴에서 발굴한 약 5000년 전 여성 유골에서 페스트균 감염 흔적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신석기 시대 인류는 이전에는 없었던 대규모 정착을 했고, 이는 불량한 위생과 교역 활성화와 결합해 감염병 발생의 원인이 됐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아울러 연구진은 ‘페스트균 창궐로 신석기 시대 유럽 인구가 급감했고, 이는 아시아 초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유럽 이주를 이끌었다’는 가설을 내놓은 바 있다.
라트비아 살라차강 근처에서 발견된 5050~5300년 전 수렵 채집인 남성의 턱뼈와 치아. 남성 유골 디엔에이(DNA) 분석을 해보니 흑사병 원인균인 페스트균 감염 흔적이 나왔다. 베를린/AFP 연합뉴스
그러나 이번 라트비아 유골을 분석한 연구진은 덴마크 연구팀의 가설에 대해 회의적이다. 크라우제키오라 교수는 “우리는 이런(석기 시대) 페스트균 초기 형태가 매우 큰 감염사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석기 시대 흑사병 매장지가 발견된 곳이 드물고 라트비아 유골이 조심스럽게 매장된 점 등으로 미뤄봤을 때 석기 시대 인구 감소 원인을 흑사병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고, 석기 시대 원시 흑사병 증상이 가벼웠으리라는 추정이다. 크라우제키오라 교수는 “인구 감소에는 기후변화 등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번 연구로 석기 시대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불렀는지와 관련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2018년 발표된 스웨덴 유골 연구 논문의 공동저자인 덴마크 코펜하겐대 시몬 라스무센 교수는 “이번 새로운 연구가 석기 시대 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흑사병 때문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라스무센 교수는 석기 시대 흑사병이 비교적 가벼운 병이었다는 증거는 없다며 “우리는 대규모 정착과 무역이 이 시기(신석기 시대)에 있었던 것을 안다. 따라서 사람 간의 교류가 당시 유럽 감염병 확산의 원인일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