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기간 내내 세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느라 ‘위기의 총리’란 별명으로 불렸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메르켈이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고 4년 더 총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임기 종료를 의미하는 독일 총선이 26일로 다가왔지만, 독일 언론의 평가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인기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2005년 11월 독일 사상 첫 여성 총리로 권좌에 오른 메르켈은 이번 선거에서 스스로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역사상 자발적으로 퇴장한 첫 총리’라는 새 기록을 남기려 하고 있다. 전후 독일의 첫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1949~1963)부터 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까지 그동안 모든 독일 총리들은 타의로 사임하거나 선거에 져서 물러나야 했다. 최초의 동독 출신, 최초의 여성, 최연소 독일 총리로 시작해, 동서독 통일을 이뤄낸 헬무트 콜(1930~2017) 전 총리와 함께 최장기간 재직 기록을 가진 메르켈은 16년 임기 마지막 한 달 동안에도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양손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대어 다이아몬드 모양을 만드는 메르켈 특유의 손동작을 ‘메르켈의 마름모’라고 한다. 요즘 많은 정치인이 이 자세로 사진을 찍곤 한다. 메르켈이 속해 있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연정을 꾸리고 있으면서도 경쟁하는 사회민주당의 올라프 숄츠 대표도 최근 ‘마름모’ 모양으로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 서서 화제가 됐다. 임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권력누수 대신 칭송과 경의의 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다음 총리 후보들이 앞다퉈 ‘메르켈다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 메르켈은 곧 시대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2005년부터 2021년까지를 메르켈 시대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녹색당 출신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 빈프리트 크레치만은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 독일은 국가사회주의의 폐허에서 일어나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했고, 콜 총리는 냉전시대를 끝내고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크레치만 주지사는 “오래된 보수정치의 현대화와 사회적 다원주의로의 전환”을 메르켈 시대의 핵심 가치로 꼽는다.
2005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은 사회민주당보다 1%포인트 높은 35.2%를 얻었다. 이 선거에서 승리해 총리 자리에 오른 메르켈은 불안한 정치적 기반 아래 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 뒤 미국의 <타임>과 <포브스>지는 유럽연합(EU) 및 미국과의 동맹관계 발전, 취임 당시 두 자릿수이던 실업률을 한 자릿수로 끌어내린 점 등을 들어 메르켈을 2006년의 인물로 선정했다. 국제무대에서 메르켈은 2006년 유럽연합 예산 분담금 협상, 2010년 유럽 금융위기 때 유로존 붕괴 저지, 2015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공격 중단 등 여러 난제에서 협상을 주도하며 독일의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까지 스트롱맨들에 의한 이른바 ‘권위주의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던 시대에 민주주의 체제가 위기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음을 앞장서 증명한 것이다.
2018년 6월, 캐나다 퀘벡에서 개최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왼쪽 셋째) 독일 총리 등 회원국 정상들이 도널드 트럼프(맨 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공동성명 채택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 회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대로 공동성명 채택이 불발되는 파행을 겪었다. 유럽연합(EU) 제공
이 같은 메르켈의 성과에 대해선 실용주의적 정신과 뛰어난 협상기술에서 나왔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2017년 동성결혼 합법화 협상이었다. 사회 내에서 합법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메르켈은 의원들이 양심에 따라 투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보수적인 기민련 내 비판이 거셌지만 자신은 ‘합법화에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뒤 하원 투표는 그대로 진행했다. 당론은 지키되 동성결혼은 합법화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또 메르켈은 2010년 원전 폐지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뒤엔 완전히 입장을 바꾸어 단계적 원전 폐지에 나섰다. 이를 두고 보수당의 가치에 어긋나더라도 시대 요구를 유연하게 수용한 “선한 실용주의자”라는 찬사가 이어진다. 하지만 지지율을 좇아 방향선회를 거듭한 “노회한 정치꾼”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하며 2015년부터 본격화된 유럽 난민사태 때는 이전의 메르켈 정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메르켈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끄는 행동을 거듭해 ‘메르켈하다’는 말을 만들 만큼 늦게 결정하는 정치인이다. 그런데 난민 수가 폭발적으로 늘자 2015년 8월 하이데나우 난민캠프에선 우익들의 위협 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민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고, 실제 90만명을 수용했다.
이로 인해 메르켈의 지지율은 처음으로 50% 밑으로 떨어졌고,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왔다. 실용주의 정치인이 커다란 손해를 감수하고 난민 수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에 대해서 책 <앙겔라 메르켈>을 쓴 매슈 크보트럽 영국 코번트리대 교수는 “메르켈의 정치적 이상의 뿌리엔 (목사의 딸인) 어린 시절 교육과 소속 정당의 기독교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베른트 울리히 <디 차이트> 부편집장도 당시 정치와 역사적 상황에서 난민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으면서도 “메르켈은 선한 마음으로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메르켈은 자신의 16년을 어떻게 결산하고 있을까. 7월22일 마지막 정기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겪은 큰 위기들로 2007~2008년 유로존 경제위기, 2015년 난민 문제, 그리고 현재의 기후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 등을 꼽았다. 경제를 두고선 합격점을 매겼고, 여성과 기후 문제에 대한 대처에는 아쉬움을 표했다. ‘위기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수없이 많은 위기를 만났지만, 마지막 1년이 특히 숨가빴다. 기후위기로 인한 독일의 대규모 수해, 코로나19 팬데믹, 가장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사태까지 메르켈이 맞서야 했던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겨져 있다. “내 임기를 관통하는 것은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결코 한 나라의 정치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우리가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날 메르켈이 남긴 마지막 당부였다.
베를린/남은주 통신원
nameunjoo1@gmail.com, 이진 <힙 베를린, 갈등의 역설 >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