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다수결제 시행시기 미루며 대타협
유럽연합이 ‘산고’ 끝에 정치통합의 디딤돌이 되는 중대한 조약 체결에 합의했다.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정상들은 23일 새벽(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연합 헌법을 ‘개정조약’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연합의 법적 기틀을 놓는 이 조약에는 헌법의 핵심조항을 담기로 해, 유럽대륙이 경제통합에 이어 정치통합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상들은 “유럽이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며 환영과 기쁨을 나타냈다. 유럽연합 순회의장 자격으로 정상회의를 주재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합의 직후 “분열이란 재앙을 피했고 유럽이 하나로 뭉쳤다”고 평가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유럽연합 집행위원장도 “우리 미래에 드리운 불확실성과 유럽의 실행력에 대한 의구심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정치 통합 합의 뒤 유럽연합의 국제적 영향력이 커질 것이란 기대도 나왔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에너지와 기후 변화 같은 세계적 현안에 유럽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약 초안에서는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부결돼 사문화된 헌법의 문제조항들을 삭제했다. 부결의 위험을 안고 있는 국민투표를 피하기 위해 헌법이란 이름도 뺐다. 국가와 국기, 공휴일 등 상징에 관한 조항 또한 유럽연합에 초국가적 지위를 준다는 지적에 따라 없앴다.
헌법안에 있던 대통령직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외교총책직을 신설하되 직함은 외무장관이 아닌 외교정책대표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대통령직은 현재 회원국이 6개월마다 돌아가며 맡는 순회의장직을 2년6개월 임기의 상임의장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막판까지 논란이 됐던 핵심쟁점은 이중다수결제였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이 팽팽하게 맞서던 독일과 폴란드를 설득해 이날 새벽 5시에 간신히 합의를 도출했다. 이중다수결제는 도입 시기를 애초 헌법안의 2009년에서 2017년으로 미루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중다수결 제도는 유럽연합의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하기 위해, 역내 인구의 65%와 27개 회원국 가운데 15개국 이상이 찬성하면 주요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조약 초안은 또 영국이 우려해온 노동과 사법권에 대한 유럽연합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고 영국 관리들이 말했다. 유럽연합은 정상들이 합의한 조약 초안을 토대로 연말까지 최종안을 마련하고, 내년 각 회원국의 비준을 거쳐 유럽의회 선거가 예정된 2009년 상반기에 조약을 발효시킬 계획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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