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촛불 든 한국과 비슷
24개국 400여곳 대규모 시위
노동·환경 조건 등 대폭 후퇴
쇠고기 등 먹거리 안전 부각
24개국 400여곳 대규모 시위
노동·환경 조건 등 대폭 후퇴
쇠고기 등 먹거리 안전 부각
유럽연합(EU)과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지난 11일 유럽 전역에서 물결쳤다. 주요 반대 이유는 이미 진통 끝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한국 사례와 거의 비슷했다. 세계 최대 경제권의 하나인 유럽연합 안에서도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의 고삐 풀린 유입 가능성에 대한 공포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시위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에서 벌어졌다. 영국에서만 런던 등 15개 지역에서 시위가 이뤄졌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전했다. 이날 시위 준비에 관여한 한 사회단체 관계자는 적어도 유럽 24개 나라 400여 지역에서 시위가 진행됐을 것으로 추산했다. 미-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은 ‘범대서양 무역과 투자 파트너십’(TTIP) 또는 ‘범대서양 자유무역협정’(TAFTA)으로 불리는데, 시위대는 ‘스톱 티티아이피’, ‘스톱 티에이에프티에이’라고 적힌 팻말과 펼침막을 앞세운 채 퍼포먼스를 하거나 행진에 나섰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지난해 교역과 투자를 강화해 더 높은 성장과 더 많은 고용을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자유무역협정 협상에 나섰다. 이후 유럽 안에선 격렬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으로 유럽연합 국가들의 노동 조건과 소비자 보호, 환경 규제 등이 대폭 후퇴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식료품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산 식료품 수입이 자유로워지면 유럽에선 한층 강하게 규제하는 유전자조작 농수산물과 염소 세척을 거친 쇠고기며 닭고기 등이 마구잡이로 수입·유통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조항도 핵심 우려 사항이다. 유럽연합에 투자한 미국 기업들이 어떤 국가의 정책 변화에 의해 이익을 침해당할 경우 해당 국가를 제소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도 찬반이 날카롭게 부딪친 최대 쟁점이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 반대론자들도 이 조항이 도입되면 미국 기업들에게 유럽의 각종 기준을 바꿀 수 있는 실질적 영향력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영국에선 특히 국민건강보험(NHS) 시스템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정부가 바뀌고 관련 정책이 변화할 경우, 미국 기업들이 이 조항을 이용해 불이익을 보상하라고 제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런 반대를 의식해 실시한 공공협의 과정에선 무려 15만건의 의견이 접수됐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협상을 통해 기존의 유럽식 기준이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협상 과정 또한 투명하게 공개될 것이라고 방어에 나섰다. 국민건강보험과 관련한 영국 등의 주권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유럽연합 각국의 노조와 사회단체 등에선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건강보험 민영화 움직임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런 분야는 협상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비시>가 전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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