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옛 명성 퇴색
528만명 시간당 1만3100원 이하
‘최소 인간적 삶’ 보장 소득 밑돌아
“질 낮은 일자리 고용 많아” 분석도
528만명 시간당 1만3100원 이하
‘최소 인간적 삶’ 보장 소득 밑돌아
“질 낮은 일자리 고용 많아” 분석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어를 낳을 만큼 사회보장제도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 이제는 노동자 5명 중 1명꼴로 ‘생활임금’ 이하 소득으로 살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보수당이 집권중인 영국 정부는 생활임금을 올렸고, 역시 보수당 소속 정치인이 시장으로 있는 런던도 기준 생활임금을 올리기로 했다. 생활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는 좌우가 따로 없는 것이다. 생활임금이란 최소한의 생계비를 의미하는 최저임금과 달리, 주거·교육·문화비와 물가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임금 수준을 말한다.
시장조사 업체 ‘마킷’이 회계·컨설팅 회사 ‘케이피엠지’(KPMG)의 의뢰를 받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 노동자의 22%에 해당하는 528만명이 지난해 영국 생활임금 기준인 시간당 7.65파운드(약 1만3100원) 이하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3일 영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조사 때보다 1%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직종별로 보면 식음료와 유통업체 종사자들의 급여가 생활임금 이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선술집에서 일하는 노동자 90%가 생활임금 이하 급여를 받아 상황이 제일 심각했고, 음식점 웨이터·웨이트리스 85%, 소매 업체 노동자 70%의 급여도 생활임금에 못 미쳤다. 비정규직의 43%가 생활임금 이하를 받아 정규직(13%)보다 열악했고, 여성은 4분의 1이 생활임금 이하 소득을 받아, 남성(16%)보다 상황이 나빴다. 생활임금 운동을 지지하는 성제임스피커딜리교회 목사인 루시 윙킷은 “많은 사람이 수지를 맞추기 위해 동시에 두세 개 일을 하고 있다”며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시간이나 주위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 따윈 없다”고 <비비시>(BBC) 방송에 말했다.
영국에선 최근 노동시장이 ‘최저임금의 덫’에 빠져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올해 6~8월 실업률은 6%로 2008년 9~11월 이후 가장 양호하지만, 많은 노동자들이 생활임금에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 질 낮은 일자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도 문제점을 의식해 3일 런던을 제외한 지방의 생활임금을 지난해보다 2.6% 올린 시간당 7.85파운드(약 1만3400원)로 인상했다. 보수당 소속의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도 생활임금 지지자로, 런던시는 생활임금을 시간당 8.8파운드(약 1만5000원)로 지난해보다 소폭 올릴 예정이다.
생활임금은 강제 규정인 최저임금과는 달리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제도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생활임금 보장에 참여하는 기업이 최근 갑절로 늘어나 1000여곳에 이르고 있으나, 이는 영국 전체 490만 업체 중 아주 작은 비율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바클레이스와 에이치에스비시(HSBC) 같은 대기업들은 참여하고 있지만 저임금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참여를 꺼린다. 카티아 홀 영국산업연합 부총재는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보다는 삶의 질을 대체적으로 높일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생활임금은 영국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인천시 부평구와 서울시 성북구 등이 구에서 직접 고용한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생활임금 제도를 조례로 도입했고, 서울시도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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