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 있는 시사주간 <샤를리 에브도>에서 언론인 등 12명을 살해한 총기 테러 용의자 셰리프 쿠아시(왼쪽)와 사이드 쿠아시 형제의 사진. 프랑스 경찰 제공/EPA 연합뉴스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초유의 언론사 테러를 벌이고 도주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인질극까지 벌인 테러 용의자 사이드 쿠아시(34)와 셰리프 쿠아시(32) 형제는 그야말로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사법당국은 쿠아시 형제에 대해 급진 이슬람주의자의 영향을 받은 ‘애송이’로 판단했다. 형제는 프랑스에서 알제리계 이민자 부모한테서 태어났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프랑스 이곳저곳의 고아원과 위탁가정 등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랑스 사법당국이 먼저 위험인물로 감지한 것은 동생 셰리프였다. 셰리프는 2003년께부터 파리 북동부의 공원 이름을 딴 ‘뷔트쇼몽 네트워크’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셰리프가 22살 때인 2005년 이라크에 무장대원을 파견하는 일을 하다가 발각되면서 이들의 활동이 드러났다. 당시 조사를 담당했던 전 대테러 담당 검사인 장루이 브뤼기에르는 셰리프의 첫인상에 대해 “애송이 같았다”고 말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2005년 그를 처음 봤을 때 별로 깊은 인상을 못 받았다. 지도자의 영향력 아래 있는 특별한 개성이 없는 애송이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셰리프는 파리 제19구 모스크 등에서 정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던 파리드 베니에투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셰리프 자신도 시리아를 거쳐 이라크에서 미군과 싸우려 했는데, 그 이유로 “(나의 멘토가) 순교자로 죽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익명을 요구한 한 프랑스 치안판사가 말했다.
알제리계 이민자가 부모
어려서 버려져 고아원 전전
모스크 지도자에게서 영향 받아
동생, 체포·감옥행 거듭하며 킬러로
형은 예맨서 알카에다 훈련 받아
시사 주간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 공격을 받아 12명이 숨진 다음날인 8일(현지시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조명을 끈 에펠탑이 깊은 어둠에 잠겨 있다.
파리/AFP 연합뉴스
셰리프는 방송사 <프랑스3>이 자생적 지하디스트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나온 적도 있다. 2004년 촬영된 이 방송에서 그는 랩을 좋아하고 모스크에 가기보다는 예쁜 여성과 만나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으로 나온다. 셰리프는 2008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출소 뒤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피자 배달원이나 슈퍼마켓에서 생선 판매원으로 일했으며, 결혼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슈퍼마켓 상사는 “쓸데없는 잡담도 거의 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하지만 그는 2008년 유죄 판결 뒤에도 뷔트쇼몽 네트워크를 통해 알게 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2010년에는 1995년 파리 생미셸 지하철역에서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가 붙잡힌 알리 벨카셈의 탈옥 시도에 관여한 혐의로 다시 체포됐다. 검찰이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해 셰리프는 4개월 만에 풀려났다. 브뤼기에르 전 검사는 이 시기 셰리프와의 두번째 만남에서 애송이였던 셰리프가 ‘킬러’가 됐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형인 사이드는 셰리프와 달리 전과가 없다. 하지만 미국 정보당국은 사이드가 2011년 예멘에 가서 몇개월 동안 알카에다 연계 조직에서 사격술 등 군사훈련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전했다.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예멘 정보당국 고위 관계자가 “사이드는 2011년 미국 출신 이슬람 과격파 성직자 안와르 아울라키를 만났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아울라키는 아라비아반도 알카에다(AQAP)를 이끌던 인물로 2011년 미국의 드론(무인기) 공격으로 숨졌다. 베르나르 카즈뇌브 프랑스 내무장관은 “사이드가 이번 테러 공격을 주도한 듯 보인다”고 말했다.
형제는 모두 미국 당국이 미국행 항공기 탑승을 불허한 비행금지 명단에 올라 있었다. 미국 정부가 이들을 잠재적 테러 위험 인물로 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행 금지 대상자들은 수만명에 이른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