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북쪽 외곽 19구에 있던 이슬람 사원인 아다와 모스크가 철거된 현장.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저지른 범인 중 한명인 셰리프 쿠아시는 이곳 19구에 거주하면서 아다와 모스크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아다와 모스크 건물은 현재 철거된 채 방치돼 있다.
[르포] 테러 이후 파리 이민자거주지역
지난달 25일 프랑스 파리 북동쪽 19구에 있는 지하철역 포르트 드 라 빌레트에 내리자, 군인들이 방탄조끼를 입고 손에 총을 든 채 거리를 순찰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파리 시내 중심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는 달리 이곳 거리는 높이 솟아있는 허름한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히잡으로 몸을 감싼 채 걸어다니는 무슬림 여성들이 눈에 띄었고, 버스 정류장 한 쪽에는 노숙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명품 브랜드 가게와 카페, 그리고 미술관들이 들어차 있는 파리 시내 중심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테러 주도 쿠아시 형제 살았던 19구
허름한 아파트 많고 곳곳 노숙자
소득 부유층 지역의 절반 머물러
주류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가 “무슬림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다
하지만 표현자유 절대시에 불편” 파리 19구는 시사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를 겨냥한 테러를 저지른 사이드 쿠아시와 셰리프 쿠아시 형제가 거주했던 곳이다. 동생 셰리프가 2005년 이라크로 극단주의자들을 보내려 했던 혐의로 체포됐을 때, 프랑스 당국은 셰리프가 속한 조직을 ‘파리 19구 네트워크’라 이름 붙였다. 알제리 이민자 가정 출신인 쿠아시 형제는 이곳을 생활 기반으로 삼았고, 셰리프는 2000년대 초반 이 지역의 아다와 모스크에 다니며 이슬람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찾아간 아다와 모스크는 철거된 뒤 공사장으로 변한 채 방치돼 있었다. 아다와 모스크 홈페이지에는 철거된 건물 주소가 여전히 기재돼 있었고,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를 절대적으로 규탄한다. 우리는 세속적 공화국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 있었다. 쿠아시 형제가 살았던 파리 19구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거주지로, 이곳 가구의 월 소득 중간값은 2367유로(2011년 기준)로,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는 에펠탑 근처 7구의 가구 월 소득 중간값 4173유로의 56% 정도에 불과하다. 19구에서 많이 눈에 띄는 아파트들의 상당수는 당국이 공공임대주택으로 건설한 건물들로, 이 건물들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주류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간다. 대도시 외곽 지역을 일컫는 방리유 중에서도 파리 북동부 방리유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열악한 생활, 차별 받는 삶은 2005년 소요 사태로 폭발하기도 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마누엘 발스 프랑스 총리가 “우리는 문화적,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옛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 문제가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르몽드>는 “프랑스의 35년 방리유 정책이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파리의 무슬림들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뒤 무슬림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더욱 악화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한 무슬림 대학생은 “무슬림이라고 특별한 주목을 받는 일 자체가 부담스럽다. 무슬림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다”며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하다”고 말했다. ‘나는 샤를리다’의 물결이 표현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동안,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소외된 채 살아가던 젊은이들이 테러에 나서게 된 배경이 된 불평등과 무슬림 차별의 문제는 아직 직시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뒤 2주 동안 무슬림이나 이슬람 사원을 겨냥한 사건이 116건 발생했다고 프랑스 언론은 전했다. 긴장은 19구를 비롯해 무슬림 이민자들이 살아가는 지역 곳곳에서 느껴졌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5구의 그랜드모스크 정문에는 총을 든 경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테러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라고 시민들은 말했다. 파리의 아랍문화원 건물 전면에는 빨간 색으로 커다랗게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고 쓴 문구가 붙어 있고, 검문을 두번 통과한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아랍문화원에서 만난 장 자크 랑 전 문화부 장관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극단주의자들의 잘못된 선전 선동에 넘어간 일부 젊은이들의 잘못된 선택 탓이라고 말해, 발스 총리의 인식과는 차이를 보였다. 에펠탑은 테러 이후 잠시 껐던 화려한 전등을 다시 켰지만, 프랑스가 치유해야 할 상처는 아직 깊어 보였다. 파리/글·사진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허름한 아파트 많고 곳곳 노숙자
소득 부유층 지역의 절반 머물러
주류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가 “무슬림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다
하지만 표현자유 절대시에 불편” 파리 19구는 시사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를 겨냥한 테러를 저지른 사이드 쿠아시와 셰리프 쿠아시 형제가 거주했던 곳이다. 동생 셰리프가 2005년 이라크로 극단주의자들을 보내려 했던 혐의로 체포됐을 때, 프랑스 당국은 셰리프가 속한 조직을 ‘파리 19구 네트워크’라 이름 붙였다. 알제리 이민자 가정 출신인 쿠아시 형제는 이곳을 생활 기반으로 삼았고, 셰리프는 2000년대 초반 이 지역의 아다와 모스크에 다니며 이슬람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찾아간 아다와 모스크는 철거된 뒤 공사장으로 변한 채 방치돼 있었다. 아다와 모스크 홈페이지에는 철거된 건물 주소가 여전히 기재돼 있었고,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를 절대적으로 규탄한다. 우리는 세속적 공화국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 있었다. 쿠아시 형제가 살았던 파리 19구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거주지로, 이곳 가구의 월 소득 중간값은 2367유로(2011년 기준)로,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는 에펠탑 근처 7구의 가구 월 소득 중간값 4173유로의 56% 정도에 불과하다. 19구에서 많이 눈에 띄는 아파트들의 상당수는 당국이 공공임대주택으로 건설한 건물들로, 이 건물들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주류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간다. 대도시 외곽 지역을 일컫는 방리유 중에서도 파리 북동부 방리유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열악한 생활, 차별 받는 삶은 2005년 소요 사태로 폭발하기도 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마누엘 발스 프랑스 총리가 “우리는 문화적,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옛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 문제가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르몽드>는 “프랑스의 35년 방리유 정책이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파리의 무슬림들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뒤 무슬림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더욱 악화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한 무슬림 대학생은 “무슬림이라고 특별한 주목을 받는 일 자체가 부담스럽다. 무슬림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다”며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하다”고 말했다. ‘나는 샤를리다’의 물결이 표현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동안,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소외된 채 살아가던 젊은이들이 테러에 나서게 된 배경이 된 불평등과 무슬림 차별의 문제는 아직 직시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뒤 2주 동안 무슬림이나 이슬람 사원을 겨냥한 사건이 116건 발생했다고 프랑스 언론은 전했다. 긴장은 19구를 비롯해 무슬림 이민자들이 살아가는 지역 곳곳에서 느껴졌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5구의 그랜드모스크 정문에는 총을 든 경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테러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라고 시민들은 말했다. 파리의 아랍문화원 건물 전면에는 빨간 색으로 커다랗게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고 쓴 문구가 붙어 있고, 검문을 두번 통과한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아랍문화원에서 만난 장 자크 랑 전 문화부 장관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극단주의자들의 잘못된 선전 선동에 넘어간 일부 젊은이들의 잘못된 선택 탓이라고 말해, 발스 총리의 인식과는 차이를 보였다. 에펠탑은 테러 이후 잠시 껐던 화려한 전등을 다시 켰지만, 프랑스가 치유해야 할 상처는 아직 깊어 보였다. 파리/글·사진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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