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유럽

“나치 범죄 잊지 말자”…깨어있는 독일인들의 힘

등록 2015-05-17 20:05수정 2015-05-17 21:28

나치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이 맨 처음 마주치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가 쓰인 철문 뒤로 이곳을 찾아와 비극적인 과거사를 성찰하려는 방문객들이 보인다.
나치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이 맨 처음 마주치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가 쓰인 철문 뒤로 이곳을 찾아와 비극적인 과거사를 성찰하려는 방문객들이 보인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법과대학 앞 광장에는 유리 아래 지하에 텅 빈 책장들이 내려다보이는 ‘가라앉은 텅 빈 도서관’이 있다. 1933년 5월10일 나치에 동조하는 독일학생연합 소속 극우파 학생들이 “비독일적 서적들을 없애버려야 한다”며 수만권의 책을 불태운 ‘나치판 분서’의 현장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프란츠 카프카, 에밀 졸라, 카를 마르크스, 에리히 케스트너 등 ‘순수한 독일 정신에 방해되는 외국인, 유대인, 염세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의 작품이 잿더미가 됐다.

지난 3일 이곳에서 만난 독일 언론인이자 큐레이터인 마르틴 바이어는 “당시 유명한 독일 작가가 쓴 ‘지금 책을 태우면 나중에는 사람도 태우게 될 것’이란 경고는 이후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강제수용소에서 현실이 됐다”며 “이곳에 기념관을 세운 것은 나치즘 확산의 전주곡인 이 사건을 되새김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8일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바로 옆 ‘홀로코스트 학살 피해 유대인 추모관’. 거대한 관들처럼 보이는 회색빛 돌들이 미로처럼 서 있는 추모관 앞에서 건립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과거를 사과하는 독일 정치인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팔순의 유대인 생존자들, 이 시설을 세우기 위해 신나치 세력의 위협에 맞서며 17년 동안 노력했던 시민운동가, 10대 고등학생들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2차대전 종전뒤 독일에서도
과거사 침묵·부정 목소리 높았지만
‘68혁명’이 사과·반성 이끈 분수령
학생들이 진실을 따져물었다
왜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느냐고…

수많은 토론과 논쟁이 이어졌고
170만명에게 강제노역 피해배상
기념·추모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이처럼 역사를 직시하고 있기에
세계인들은 그들을 존경한다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은 베를린 곳곳에선 나치 범죄와 독일의 2차대전 책임을 되새겨 기억하려는 기념관과 추모 시설들이 ‘우리의 잘못과 책임을 잊지 말자’고 맹세하고 있는 듯하다. 독일 지도자들도 다시 한번 과거의 희생자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고 있다.

전쟁과 독재 희생자 추모센터에 놓인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조각상.
전쟁과 독재 희생자 추모센터에 놓인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조각상.
3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최초의 나치 강제 집단수용소인 바이에른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가 빗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나치와 생각, 신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수용소에 갇히고, 고문받고, 죽임을 당했다”며 “우리는 희생자들을 위해,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8일엔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나치와 싸우다 희생된 소련 병사들의 묘지에 헌화했다. 메르켈 총리는 10일엔 다시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해 2차대전에서 희생된 소련인들을 추모하며 헌화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왜 독일은 일본과 달리 끝없이 반성하고 사과하는가’ ‘나치 과거를 짊어진 독일이 어떻게 이웃국가와 화해하고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는가’를 묻게 된다. 이달 초 독일 외무부의 초청으로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보여주는 현장을 돌아보는 동안 기자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사과와 반성’이 2차대전 직후 자동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독일 사회 전체가 오랜 토론과 노력을 통해 배워온 과정이었다는 답을 내놨다. 분쟁 해결과 평화 정착을 위한 시민단체 베르크호프 재단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 마르티나 피셔 박사는 “독일 역사 반성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민사회가 중심적 역할을 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많은 기념물들이 시민사회의 제안과 노력으로 건설되었다. 용기 있는 정치가들과 학계,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했다”고 말했다.

베를린 중심가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학살 피해 유대인 추모관.
베를린 중심가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학살 피해 유대인 추모관.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도 과거 책임에 침묵하거나 이를 부정하려는 목소리가 많았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당시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이 외부에서 부여한 재판이었고, 독일 언론이나 대중의 관심은 적었다. 나치에 협력했던 많은 이들이 여전히 정부에서 일했다. 냉전이 첨예해지자 미국 점령 당국도 전범 처벌보다는 공산 진영에 맞설 ‘강한 서독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당시 독일인들의 주요 관심도 경제를 재건하고 발전시키는 데 집중돼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바꾼 첫 계기는 1961년 나치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 학살에서 주요한 구실을 한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었다고 피셔 박사는 설명한다. 이 재판이 독일 언론에서 크게 조명되면서 나치 과거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독일 사회를 사과와 반성, 화해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든 결정적 분수령은 1968년 독일 학생운동이었다. ‘68혁명’ 세대 젊은이들은 왜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저질렀고 2차대전에서 부모 세대가 무엇을 했는지 진실을 따져묻기 시작했다. 피셔 박사는 “학생들이 부모 세대가 나치의 시대에 무엇을 했는가란 질문을 제기하고 반성을 요구하면서, 사람들이 희생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고 했다. 왜 평범한 독일인들까지 나치에 협력했는가, 독일 사회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가, 수많은 토론과 정치적 논쟁이 계속됐다. 이를 계기로 독일 사회는 나치 과거사에 대한 본격적인 반성을 시작했다.

1985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서독 대통령의 “(독일이 2차대전에서 항복한) 1945년 5월8일은 해방의 날이다. 우리 모두는 나치 독재의 비인간적 시스템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선언도 또다른 분수령이었다. 처음 이 발언이 나왔을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항의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후 다시 독일 사회가 계속 토론하면서 이 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90%의 독일인들이 이 역사관에 동의하고 있다.

4일 만난 독일연방의회 의원 힐트루트 로체도 “독일이 현재 2차대전을 기억하는 방식은 오랜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1985년 바이츠제커 대통령의 연설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여전히 그날을 패배의 날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우리 대부분은 나치의 패배와 2차대전 종전이 잔인한 독재의 종언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공통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특히 젊은이들이 역사를 잘 알 수 있게 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독일의 모델을 (다른 국가에) 수출할 수는 없다. 각각의 국가가 스스로의 기억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기념관과 기념물은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려는 교육의 장이다. 5일 찾아간 오라니엔부르크 시 교외의 옛 나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세워진 기념관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교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라니엔부르크 시의 3분의 1 크기였던 이 거대한 수용소는 1936년에 설립됐는데, 나치가 처음으로 수용소 용도로 설계해 건설한 곳이다. 게슈타포와 나치군대의 훈련장이 함께 붙어 있는 이곳에 들어서면 나치가 얼마나 수감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수용소로 끌려온 이들이 처음 마주치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역설적 문구가 새겨진 문 안으로 들어서면 ‘타워 A’로 불리는 중앙감시탑이 서 있다. 이 탑에 올라서면 거대한 수용소 곳곳이 내려다보인다. 수용소 곳곳에는 수감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던 작업장이 있었다. 나치의 수용소들은 유대인을 비롯해 나치 반대자들에 대한 박해와 함께 수감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고, 이들이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살해하기 위한 고도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제 학생들을 비롯해 이곳을 찾는 시민들은 2차대전 시기 많은 독일 기업들이 수용소의 희생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얻었고, 이는 당시 독일 기득권층이 나치를 지지하는 주요한 원인이 됐음을 이해하게 된다.

독일은 2000년 8월 설립한 기억·책임·미래 재단(EVZ)을 통해 2차대전 시기 나치 수용소 등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했던 약 4000만명의 피해자 가운데, 지금까지 100여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170만명에게 배상했다. 강제 노동으로 이익을 본 기업들이 낸 돈이 주요 재원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이 단체의 이사회 자문을 맡고 있는 우타 게를란트는 8일 “미국에서 피해자들이 소송을 낸 것이 주요 계기가 됐지만, 독일에서도 시민단체들이 나서 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꾸준히 벌였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기업들이 배상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70년 폴란드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진을 바라보는 베를린 시민.
1970년 폴란드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진을 바라보는 베를린 시민.
최근에도 꾸준히 들어서고 있는 새로운 역사 기념·추모 시설들은 독일이 어떻게 계속 토론과 논쟁을 벌이면서 진실과 화해를 위해 진지하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베를린 중심가의 노이에 바헤는 19세기 프러시아 제국 근위대 위병소 건물로 지어졌다. 이후 1차대전 희생자 추모 기념관, 전쟁영웅 기념관, 동독의 반파시스트 희생자 기념관을 거쳐 독일 통일 이후 ‘전쟁과 독재 희생자 추모 센터’가 된 곳이다. 로마 시대 건축을 본떠 지은 석조건물 안에는 전쟁에서 숨진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피에타>가 조용히 서 있다. 독일 통일 뒤 헬무트 콜 총리의 제안으로 조각상이 이곳에 놓이자, 독일 사회에서는 이 조각이 기독교 중심주의를 반영하고 있고, 여성·동성애자 희생자는 무시하고 있다는 논란이 일었다. ‘누가 나치의 희생자이며, 누구를 추모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됐다. 그 결과 동성애자, 강제 노동 피해자, 신티·로마(집시)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잇따라 베를린 중심가에 들어섰다.

이곳 건물에 살던 이가 나치에 끌려가 숨졌음을 알리는 ‘발부리 아래의 돌’ 표지판.
이곳 건물에 살던 이가 나치에 끌려가 숨졌음을 알리는 ‘발부리 아래의 돌’ 표지판.
2012년 독일 의회 건물 바로 옆에 세워진 ‘신티·로마’ 기념관은 유럽에서 떠돌이로 박해받아온 로마와 신티의 역사와 이들이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당한 고통 등을 기록한 유리벽들이 이어져 있고, 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잔디밭 아래 검은 돌로 만들어진 연못에 조용히 하늘과 의회 건물이 비친다. 로마와 신티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구슬픈 음악이 고요히 기념관 안을 흐른다.

대형 기념관을 넘어, 과거를 기념하는 방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고, 시민들의 일상 가까이로 들어오고 있다. 최근 시민단체들이 진행하고 있는 ‘발부리 아래의 돌’ 프로젝트는 길가에 작은 금속판을 박아 이 집에 살던 사람이 나치에 끌려가 숨졌음을 알린다.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20㎝ 정도인 금속판 위에 누가 언제 어디로 끌려가 언제 사망했는지를 기록한다. 지금까지 6000여명분의 표지판이 길 위에 새겨졌다.

이처럼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공동의 역사적 기억과 반성이 있기에, 정부가 보수나 진보 어느 쪽으로 바뀌더라도 역사에 대한 합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독일 외무부 산하 국제문화관계기구(ifa)의 오딜라 트리벨 박사는 “독일 사회 내에도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민주주의, 투표, 언론 토론, 집회 등을 통해 계속 의견을 밝히고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왔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지을 것인가를 두고 수많은 논쟁이 있었고, 시민단체들은 네오 나치들의 반대에 맞서며 17년 동안 시위를 벌이며 계속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베를린·드레스덴/글·사진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1.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2.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3.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4.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5.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