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코이프 독일 독재청산재단 강사
[짬] 독일 독재청산재단 강사 페터 코이프
돈주고 동독 정치범 3만5천명 구제
“지속적 교류 위해 ‘상호 침묵’ 묵계” 22살때 동독 탈출하려다 잡혀 ‘복역’
서독 정부 지원으로 풀려나 ‘새삶’
“북한도 남한도 서로 바뀌어야 산다” 58년 동독에서 태어나고 자란 코이프는 82년 23살 때 서독 땅을 밟았다. 앞서 1년 전 동독을 탈출하려다 붙잡혀 10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그는 프라이카우프 덕분에 풀려나 건너올 수 있었다. 그가 탈출을 시도한 것은 동독에서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서독에 살다 동독을 택해 이주했다. 그 뒤 장벽에 막혀 갈 수 없었던 서독 이주는 75년 헬싱키조약으로 다시 허용됐다. 그때 서독에 친척이 있던 코이프의 가족도 이주신청을 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뒤로부터 그는 동독에서 모든 성공 가능성을 잃었던 것이다. “저는 다니던 학교를 떠나야 했고, 원하는 직업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육상선수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이주신청 이후 선수 활동도 할 수 없게 됐다. 스포츠댄스는 허용됐지만, 여전히 기회는 제한됐다. 그는 81년 동독체전에서 3위를 했지만, 국가대표가 되지는 못했다. 서독에서의 새 삶은 그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다시 대학에도 다니고 여러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것도 서독이 준 선물이다. 한 예로 그는 국정교과서로 운영되는 동독에서는 2차 대전에 대해 ‘나치와 공산 세력의 싸움’이라고만 배웠다. 하지만 서독에서는 2차 대전의 다면적인 성격을 배울 수 있었다. 역사를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지금도 하겐대학과 베를린자유대학의 방송과정에 등록해 독일 역사를 다시 배우고 있다. 이런 역사에 대한 관심은 2011년 그를 ‘옛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에 합류하게 했다. 동독 시절 독재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98년에 설립된 재단이다. 그는 2012년부터 시드니와 대만 등 외국을 돌며 동독의 과거사 문제점 등을 증언했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분단국 남한을 처음으로 찾은 것도 그때였다. 판문점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번 두번째 방한은 베를린 장벽 붕괴 26돌을 맞아 주한 독일대사관 초청으로 이뤄졌다. 그는 9~14일 독일학교, 독일문화원, 한국외대, 대구 계명대 등에서 주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민주사회를 위해서는) 기다리는 시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민이 돼야 합니다.” 그가 볼 때 남북한은 프라이카우프 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까. 그는 뜻밖에도 부정적이었다. “아직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꼽은 첫째 이유는 탈북자 단체들의 대북 비난이다. 동·서독은 ‘프라이카우프 제도를 통해 서독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동독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는다’는 묵계를 지켰다. 그것은 “동독 정부뿐만 아니라 서독 정부도 원했던 사안”이다. 그래야만 제도가 지속되고 더 많은 교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69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이 취한 일관된 자세”라고 설명했다. 또 그가 보기에 동·서독에 견줘 남북한은 좀더 극단적이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더 깊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독일은 분단 기간이 40년이었지만, 한반도는 70년입니다.” 그는 북한을 동독과 비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도 서독과 비교하기 어렵다고 본다. 국정교과서 문제만 해도 그렇다. 동독의 국정교과서에 의한 역사 교육에 대한 부정적 기억 탓일까? 그는 남한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교과서제에서는 “국가가 바라는 역사만 전달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한다. “북한도 변해야 하지만 남한도 변해야 합니다. 개인간의 대립이 있을 때도 두 사람이 서로 다가가야 문제가 풀립니다. 국가는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그는 북한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경험이 남북한 화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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