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탈퇴는 영국의 ‘영예로운 고립’ 노선이 배경
처음부터 유럽통합에 부정적
유로존 위기와 이민 문제가 탈퇴에 결정적
처음부터 유럽통합에 부정적
유로존 위기와 이민 문제가 탈퇴에 결정적
유럽에 대한 영국의 역사적인 외교 노선은 ‘영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었다. 유럽 대륙의 문제에서 한발 떨어져, 자신이 필요할 경우에만 개입해온 것이 영국의 전통이었다. 영국이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것도 영국의 이런 전통이 배경이다. 이는 유럽 대륙과 바다로 떨어진 영국의 지리적 조건에 기인한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안보 위기에서 자유로웠던데다, 1500년대 이후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아시아로의 직항로 발견에서 가장 유리한 지정학적 지위를 누렸다. 140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백년전쟁 뒤 대륙에서 철수한 영국은 지상군 유지 비용을 해군력으로 돌려, 해양세력의 패자가 됐다.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격파하며, 영국의 이런 위상과 외교노선은 굳어졌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대의 국력을 가진 영국은 해로까지 장악해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개입의 시기와 규모를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이런 ‘영예로운 고립’ 노선은, 결국 독일 등 유럽 대륙에서 압도적인 패권 국가가 출현해 영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 조성되어야만 유럽 대륙 문제에 개입하는 형태를 고착화했다. 이는 유럽 국가들에 ‘믿지 못할 영국놈들’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특히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려고 프로이센의 부상을 방치하거나 부추기다가 결국 19세기 후반 독일의 통일과 팽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통일 독일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영국은 이런 독일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었다. 미국과 소련이 개입해 유럽은 질서를 되찾을 수 있었다. 2차 대전 뒤 영국은 유럽통합에 부정적이었고, 통합의 한 주역인 프랑스도 영국의 합류를 거부했다. 특히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영국의 합류를 두 차례나 비토했다. 하지만 영국 경제가 침체하고, 유럽통합으로 유럽 대륙의 경제가 성장하자, 결국 1973년 보수당 정부 주도로 유럽공동체에 가입했다. 영국은 가입 뒤 집권한 노동당 내부에서 내분이 벌어져, 1975년 잔류 여부를 묻는 첫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에는 67%가 찬성했는데, 노동당 좌파들이 유럽의 자유시장 정책이 노동당의 사회주의 정책을 희석시킨다고 반대했다. 1980년대 들어 마거릿 대처 보수당 정부는 유럽공동체에 대한 분담금을 증액하는 등 유럽통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영국은 1984년 자신이 내는 분담금의 3분의 2를 다시 돌려받는 협정을 맺는 한편 회원국 내의 자유 이동을 규정한 솅겐조약에 불참하며 틈을 벌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공동통화 유로에 처음부터 불참을 선언했다. 또 1992년에는 독일 마르크화에 비해 고평가된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공격에 무릎을 꿇고는 유럽외환메커니즘(EERM)에서 축출당했다. 이는 영국 내에서 ‘유럽의 과잉규제’라는 회의론을 자아냈다. 결정적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로 폭발한 유로존 부채 위기였다. 유럽연합이 주권을 침해한다는 여론이 고조된 가운데 유럽에서 독일의 주도권은 영국민들의 우려를 키웠다. 동유럽 회원 국가로부터의 노동자 이민 증가는 국수주의 감정을 자극해, 영국독립당의 부상을 가져왔다. 독립당은 지난 선거에서 13%나 득표했다. 집권 보수당은 독립당의 의제인 유럽연합 탈퇴를 무력화하려고 선제적으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보수당은 이 공약에 힘입어서인지 예상을 뒤엎고 노동당에 압승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당초 이 공약을 매개로 유럽연합으로부터 유리한 회원국 자격을 따내는 협상용으로만 이용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이민자의 복지를 제한하는 재량권 등을 따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세력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반유럽연합 정서만 자극했다. 캐머런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공약은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결과만 낳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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