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영국 에딘버러에서 한 시민이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이 잘못됐다는 내용의 칠콧 보고서를 낭독하고 있다. 칠콧 보고서는 모두 12권 분량이다. 황정원 통신원
매년 8월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공연예술 축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칠콧 보고서를 릴레이로 낭독하는‘이라크 아웃 앤 라우드’ (Iraq Out & Loud)가 진행됐다. 지난 8일 오후 여섯시에 시작한 낭독은 총 1444명이 참가했으며 284시간 45분 후인 20일 오후 완료됐다.
칠콧 보고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참전 전후를 둘러싼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조사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영국의 참전을 부적절한 정보에 근거한 잘못된 결정이라고 결론 내렸다. 조사에는 1000만 파운드 (약 150억원)가 넘는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7년 여의 조사기간을 거쳐 지난달 6일 12권 (총 6000 페이지)의 최종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온라인에서 무료로 배포되기도 하지만, 인쇄본 가격은 750파운드 (약 100만원)가 넘는다. 발간 직후 영국 내 모든 언론이 표지 기사로 삼을 만큼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그 여파로 인한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의 사임 등 굵직한 여타 현안에 떠밀려 금새 언론과 대중에게서 잊혀졌다.
이러한 동향을 주시하던 코미디언 부트비 그래포는 “과연 누가 이 보고서를 읽을 것인가. 이 보고서는 잊혀지지 않을 것인가. 이라크 전 참전과 같은 끔직한 실수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의문 끝에 릴레이 낭독을 착안해 냈다. 낭독회의 기획자 밥 슬레이어의 말을 빌어 “심각한 주제를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약 1000 파운드의 예산은 슬레이어와 지인들의 자비 부담, 그리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충당됐다. 칠콧 보고서 자체는 후원금 잔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국방부로부터 기증받았다.
낭독 릴레이의 진행 방식은 간단하다. 지원자는 인터넷 예매 사이트를 통해 5파운드 (약 7천 원)를 지불하고 낭독 시간을 예약한다. 몸을 움추려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오두막 안으로 시간 당 최대 6명의 지원자들이 입장한다. 12권의 보고서가 쌓여 있는 책상에 낭독자가 자리하고, 이를 마주한 벤치에 다음 낭독자들이 앉는다. 각각의 낭독자는 십분 동안 보고서를 읽고 자신이 읽은 부분에 사인을 남긴 후 다음 사람과 교대한다.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소속의 토미 셰퍼드 의원, <비비시>(BBC) 라디오 4의 진행자 마크 러슨 등 정치인과 언론인부터 이라크 전 참전용사,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여 중인 예술가, 그리고 호기심에 찾아온 일반인들까지 낭독을 지원한 사람들의 배경은 다양했다. 엄마 손을 잡고 온 여섯 살 꼬마부터 여든 두 번째 생일을 맞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의 폭도 넓었다.
슬레이어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로부터 낭독이 중단되지 않도록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뜨거운 차를 준비해 준 카페 주인도 있었고, 공연을 마친 코미디언이 청중들을 이끌고 지원자가 드문 새벽 세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코미디언 캐미 싱클레어는 기린 복장을 한 채 토요일 밤 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다섯시간 동안 쉬지않고 혼자 낭독을 이어갔다. 낭독이 이뤄진 기간 내내 출근하듯 매일 아침 일곱시 낭독을 도맡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칠콧 보고서 낭독회가 열린 영국 에딘버러의 조그만 오두막
낭독을 마친 사람들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오두막 앞에 삼삼오오 모여 보고서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건조한 보고서의 극히 일부분을 읽는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데 입을 모아 새롭게 알게 된 진실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릴레이 작업을 통해 느낀 연대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낭독에 참가한 전직 저널리스트 에티엥 두발씨는 비록 대부분의 시민이 보고서를 읽지 않겠지만 이 보고서가 역사학자와 다음 세대에게 중요한 자료로 남으리란 점, 또한 발간 자체로 어느 정도 블레어 총리의 사과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보고서와 별도로 이 낭독회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아무도 듣지 않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무에 가까울 정도로 약한 목소리일지라도 여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읽는 것, 그것 만으로도 우리에겐 의미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지난 20일 칠콧 보고서 낭독회를 기획한 밥 슬레이어가 낭독회가 열린 영국 에딘버러 오두막 옆에 몸을 기울이고 있다. 황정원 통신원
칠콧 보고서 릴레이 낭독이라는 긴 여정은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함께 낭독하는 것으로 끝났다. 전 낭독과정은 두 대의 카메라를 통해 녹화되었는데 이미 이 녹화자료에 관심을 표명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슬레이어는 아직 시점이 이르다고 말을 아꼈으나 이미 대영도서관 등과 말이 오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와 별도로 이 녹화자료를 활용한 설치 예술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히며, “낭독이 끝이 아니다. 우리는 이 보고서가 잊혀지지 않도록 계속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에딘버러/황정원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