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저녁 이탈리아 중부 마르체주 페스카라델트론토에서 소방관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서 10살 소녀를 구조하고 있다. 사진은 이탈리아 방송 <스카이 이탈리아> 화면 중 일부다. AP 연합뉴스
이탈리아 중부를 덮친 규모 6.2의 강진 발생 17시간 뒤인 24일 저녁(현지시각) 피해 지역 중 한 곳인 마르체주 페스카라델트론토에서 소방관들이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잔해와 돌을 걷어내자, 어린아이의 다리가 드러났다. 이탈리아 현지 방송들이 촬영한 화면을 보면 소방관들이 건물 잔해에서 꺼낸 아이는 10살쯤 되어보이는 소녀였다. 소방관이 소녀를 구조하자 주변에선 박수를 쳤다. 지켜보던 사람이 “예쁜 소녀”(Bella ragazza)라고 소리쳤다. 한쪽에서는 아이의 이름인 듯 “줄리아”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소방관에 안긴 소녀의 윗도리는 온통 회색 흙더미로 뒤덮혔다. 원래 무슨 색깔인 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지진은 24일 새벽 3시36분께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 노르차에서 10㎞ 떨어진 곳을 진앙으로, 진원은 불과 10㎞ 깊이였다. 희생자 수는 지진 발생 이틀째인 25일 최소 247명으로 늘어났으며, 300여명이 숨진 2009년 라퀼라 지진의 희생자 수를 넘어설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부상자도 360명이 넘고 이재민은 수천명에 이른다. 이탈리아 정부는 지진 피해 지역에 아직 생존자들이 많이 남아있을 것으로 보고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피해 지역이 산악 지역 마을이고 지진으로 주요 도로가 끊긴 곳이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피해 지역 주민들은 맨손으로 잔해를 헤치며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로마 등지에서 휴가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피해 지역을 찾았다가 희생당한 어린이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페스카라델트론토 인근 아르쿠아타델트론토에서는 할머니가 4살과 7살 손자들을 지진이 일어나자 재빨리 침대 밑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아이들이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다. 아르쿠아타델트론토에서는 생후 18개월 아기가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2009년 라퀼라 지진 생존자로, 지진 뒤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구조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이탈리아 <안사> 통신은 전했다.
이번 지진 피해는 라치오주의 산악 지대 마을인 아마트리체와 아쿠몰리, 그리고 마르체주의 페스카라데트론토 등에 집중됐다. 모두 이탈리아의 뼈대로 불리는 아펜니노 산맥 인근 마을들로 지진 위험 지역이었다.
인구 2000명의 아마트리체 마을의 세르조 피로치 시장은 처음에는 “마을 절반이 사라졌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마을이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13세기에 건축된 아마트리체의 시계탑은 지진이 일어난 새벽 3시36분에 시계 침이 멈췄다. 시계탑은 무너지지 않았으나 주변 건물은 대부분 무너졌다.
24일(현지시각) 규모 6.2의 강진이 발생한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주의 아마트리체 마을에서 구조대가 무너진 건물 속의 생존자를 찾고 있다. 가운데 시계탑은 13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무너진 주변 건물들과 달리 붕괴되지 않았다. 시계는 지진이 일어났던 새벽 3시36분에서 멈춰있다. 아마트리체/AP 연합뉴스
아마트리체는 토마토와 매운 고추 등이 들어간 파스타 아마트리치아나 탄생지로 유명한 마을이며, 풍광이 뛰어나 자전거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며칠 뒤 음식 축제가 열릴 예정이어서 지진 당시 이 작은 마을에 꽤 많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35명이 투숙 중이었던 아마트리체 마을의 로마 호텔이 무너져 잔해에서 나온 주검만 5구에 이른다. 또다른 마을 아쿠몰리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가족 4명이 있던 주택이 무너져 가족이 모두 숨지기도 했다.
마리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24일 지진 피해 지역을 찾아 “어떤 가족도, 어떤 도시도 두고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헌혈협회는 지진 주요 피해 지역인 라치오주 산악 마을들 근처의 병원에 헌혈을 해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에게 전화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탈리아는 지진이 비교적 잦은 데도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지진 피해 지역이 있는 아펜니노 산맥이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이 맞물리는 곳에 있지만, 이 지역 마을 건물들은 내진 설계가 되지 않은 벽돌 건물들이 많았다. 이탈리아 정부 당국자는 아마트리체와 아쿠몰리 등에서 건물 내진 설계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로 그 이전에 지은 건물은 철거하고 재건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에이피>(AP) 통신은 이탈리아 건물 70%가 내진 설계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칼럼니스트인 세르조 리초는 25일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델라세라>에 “지난 40년 동안 큰 지진이 적어도 8번은 일어난 나라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라고는,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난 뒤 사람을 구한다는 것 뿐”이라고 비판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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