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지서 ‘난민의 비참함’ 환기
“단 하루 만에 모든 걸 잃었구나! 부디 나의 명예를 존중해다오.”
트로이의 왕비가 두 팔을 벌려 울부짖으며 땅에 무릎을 꿇는다. 고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406년)의 비극 <헤카베>의 한 장면이다.
지난 3~4일 그리스 델로스섬의 고대 야외극장에서 2100년 만에 고대 그리스 비극이 공연됐다고 <알자지라> 방송이 6일 보도했다. 그리스 연극인들이 시리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전쟁과 박해를 피해 목숨을 걸고 에게해를 건너는 난민들의 처지를 비극의 주인공 헤카베에 비유해 난민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뜻에서 기획했다. 공연작에 <헤카베, 한 난민>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다.
원작 <헤카베>는 전쟁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은 트로이 왕비의 비극적 삶을 묘사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잃은 영웅 헥토르가 헤카베의 아들이다.
델로스는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그리스 문화·역사의 보고다. 그리스 신화에서 쌍둥이 남매인 태양과 음악의 신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에게해 키클라데스 군도 고유적청의 디미트리스 아타나술리스 청장은 “2천년 동안 연극 대사가 들리지 않던 유적지 극장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공연을 했다”며 “전쟁과 난민의 비참함이라는 엄중한 문제를 집중조명하려 했다”고 밝혔다. 연출을 맡았던 니코스 카라요르고스는 “헤카베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은 여성, 인간의 상징”이라며 “시리아 난민이 바로 지금 그런 상실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델로스섬은 기원전 3000년께 사람이 정착한 이래 기원전 3세기까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나, 기원전 1세기 무렵 이웃 왕국과 해적들의 약탈로 급속히 쇠락하면서 아무도 살지 않는 섬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신전과 극장 등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 풍부해, 지금도 매년 1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2100년 만에 그리스 비극이 재연된 델로스 극장은 6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번 공연에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관객을 하루 300여명 정도로 제한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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