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동성애 연인 베를렌이 쐈던 벨기에제 6연발 리볼버 권총. BBC 누리집 갈무리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1891)를 죽일 뻔했던 권총이 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5억원이 넘는 고가에 팔렸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권총 중 하나다.
크리스티 쪽은 랭보의 동성애 연인이자 시인인 폴 베를렌(1844~1896)이 랭보를 쏘았던 6연발 리볼버 권총이 이날 애초 평가액의 7배에 이르는 43만4500유로(약 5억4000만원)에 낙찰돼 팔렸다고 밝혔다고 <아에프페>(AFP) 등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대학 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 응시까지 거부하고 극단적 탐미주의에 심취했던 랭보는 10대 후반에 동료 시인인 베를렌과 만났다. 랭보의 작품 세계에 매료된 베를렌이 1871년 랭보를 파리로 초청하면서, 둘은 문학을 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베를렌은 당시 문단에서 랭보의 진가를 알아본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베를렌은 아내와 두 아이를 둔 27살 유부남이었으나 랭보 곁에 있고 싶어 가족을 포기했다. 둘은 함께 방랑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사랑했다.
그러나 둘의 기질은 너무 달랐다. 베를렌은 랭보의 자유분방하고도 까칠한 영혼을 잡아두기 버거웠고, 랭보는 시를 삶의 위안으로 삼으려던 베를렌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할리우드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에서 랭보(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동성애 연인 베를렌(데이비드 슐리스)의 다정했던 한 장면. 영화 <토탈 이클립스> 스틸 컷.
1873년 7월, 베를렌은 둘의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하고, 당시 랭보가 머물던 벨기에 브뤼셀의 호텔로 찾아갔다. 그의 포켓에는 인근 총기 가게에서 산 권총이 감춰져 있었다.
랭보의 술회에 따르면, 둘은 호텔 방에서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고, 함께 울었고, 술을 먹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베를렌이 랭보에게 “작별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외치며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2번 당겼다. 한 발은 랭보의 손목에 적중했고, 다른 한 발은 벽으로 날아갔다. 베를렌은 이 사건으로 2년형을 선고 받았고, 두 남자의 관계는 2년여만에 파국으로 끝났다. 둘의 짧지만 불꽃 튀는 애증은 120여년 뒤 미국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랭보 역으로 열연한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년)에서 재연되기도 했다.
두 시인은 결별 뒤 각자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베를렌은 브뤼셀의 감옥에서 32편의 시를 썼다. 랭보는 프랑스로 돌아와, 대표작 중 하나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발표했다. 베를렌과의 애증, 젊은날의 고통과 방황이 오롯이 담겼다. 랭보는 고향 샤를빌로 돌아왔다가 아프리카 여행 중 얻은 종기가 덧나 마르세유에서 1891년 37살 나이로 요절했다.
랭보를 쏜 권총은 애초 구매점으로 되돌아갔다가 1981년 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벨기에의 무기 수집광인 자크 루트의 손으로 넘어갔다. 루트는 앞서 언급한 영화 <토탈 이클립스>를 보기 전까지 이 권총의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부엌 선반에 보관해왔다고 한다.
그는 2004년 브뤼셀에서 랭보와 베를렌에 관한 특별전시회를 기획한 베르나르 부스만을 만나 이 권총의 소장 사실을 밝혔다. 브뤼셀의 왕립 군사학교의 무기 전문가가 권총의 진품 여부를 확인하면서, 이 권총은 한 세기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부스만은 벨기에 언론에 “그들이 농담하는 걸로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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