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빅토리에이 광장에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반부패,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스마트폰 불빛으로 파랑·빨강·노랑 3색의 루마니아 국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부쿠레슈티/EPA 연합뉴스
한국에 ‘촛불 시민’이 있다면 루마니아에는 ‘스마트폰 시민’이 있다.
루마니아 정부의 부패범 사면 추진에 반발한 시민들이 2주째 저녁마다 ‘스마트폰 불빛 시위’를 벌이며 ‘부패 척결’에 대한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다. 루마니아 의회가 13일 의원 310명의 만장일치로 ‘반부패 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의결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 외신들이 전했다. 반부패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번지면서,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집권한 사회민주당 연립정부도 출범 두 달이 채 안돼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투표 실시 방안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집권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연립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온 중도 우파 자유당의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이 제안했다. ‘반부패’ 국민투표의 구체적 안건과 일정은 이를 처음 발의한 요하니스 대통령 쪽에서 조만간 초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13일 루마니아 의회에서 의원들이 반부패 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에 대한 표결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날 표결은 310명 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부쿠레슈티/AP 연합뉴스
앞서 지난달 31일, 사민당 연정을 이끄는 소린 그린데아누 총리는 징역 5년 이내의 기결수를 대거 사면하고 부패사범도 직권남용에 따른 국고 손실액이 20만레우(약 5500만원)를 초과할 경우에만 징역형을 부과하도록 하는 긴급명령을 발령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이어갔다. 정부는 결국 닷새만에 사면령을 철회했지만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8일 의회는 내각 불신임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통과되지는 못했으며, 다음날 법무장관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러나 부패한 기득권 체제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민심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지난 12일 일요일 저녁에는 수도 부쿠레슈티를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들에서 80만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1989년 12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대통령 부부가 시민들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후 28년만에 최대 규모다. 시민들은 휴대폰 불빛으로 파랑·노랑·빨강 3색의 루마니아 국기가 물결치는 장관을 연출했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13일 온라인판에서 루마니아 시위를 “스마트폰 혁명”으로 표현하면서 “일부 정치학자들은 ‘두번째 시민혁명’을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시위 시민들은 의회에 낸 청원서에 “지금 루마니아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고 있다. 루마니아의 ‘빛의 혁명’은 전 유럽과 세계의 민주주의의 표본이다”라고 썼다. 날마다 시위에 나온다는 부쿠레슈티 시민 카탈리나(60)는 <아에프페> 통신에 “정부가 출범 첫 달만에 투명하고 정직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면 앞으로 (남은 임기인) 4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말했다.
12일 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빅토리에이 광장에서 ‘반부패,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한 시민이 영문으로 “부패를 멈춰라”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부쿠레슈티/AP 연합뉴스
<슈피겔>은 특히 대학생을 비롯해 젊은 세대의 “정치 엘리트 집단을 겨냥한 끈질기고 조직적인 시위”에 주목했다. 이들은 페이스북·트위터·파이어챗 등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매일 저녁 도심 광장과 거리를 점령한다. 국기를 흔들고, 권력기관의 건물벽에 빛으로 “저항” “사퇴” 같은 글자를 투사하며, 바리케이드가 쳐진 정부청사 앞에서 “도둑들, 도둑들, 도둑들!”이란 구호를 외친다. 시위 지도자 중 한 명인 세바스티안 부르두자(31)는 “4살때 아버지가 겨울 코트 위로 혁명 완장을 찬 모습과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차우셰스쿠의 즉석재판과 처형 장면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21세기의 저항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며 “나는 이 나라를 바꾸고 봉사하고픈 꿈이 있다”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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