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펜, 마크롱에 대패했지만 득표율 33.9% 얻어
2002년 17.8% 그친 아버지보다 크게 선전
EU 탈퇴투표 공언 르펜 패배에 유럽 지도자들 안도
그러나 6월 총선에서 국민전선 제1야당 부상 전망
반이민·반이슬람·반EU 민족주의 토양 재확인도
2002년 17.8% 그친 아버지보다 크게 선전
EU 탈퇴투표 공언 르펜 패배에 유럽 지도자들 안도
그러나 6월 총선에서 국민전선 제1야당 부상 전망
반이민·반이슬람·반EU 민족주의 토양 재확인도
“마크롱! 프랑스인들이 유럽의 미래를 선택해 행복합니다. 함께 더 강하고 공정한 유럽을 만듭시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6일 밤(현지시각) 에마뉘엘 마크롱의 프랑스 대선 승리가 확실해지자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룩셈부르크 총리 출신인 그의 글에선 의례적 축하 인사를 뛰어넘는 환호의 심정이 읽힌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곧바로 마크롱과 통화해 브렉시트 문제를 논의할 정도로 그의 당선을 애타게 기다린 티를 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외무장관은 트위터에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국가 슬로건을 프랑스어로 올리며 “위대한 국가가 유럽의 중심에 남게 됐다”고 썼다. 스페인이나 그리스 등의 정상들도 기쁨에 겨운 반응을 내놨다.
뜨거운 반응에서 엿볼 수 있듯, 이번 프랑스 대선은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결선에 진출하자 유럽 지도자들은 설마설마하며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크롱을 노골적으로 응원한 것은 유럽 지도자들만이 아니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4일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에서 “난 여러 선거에 간여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선거는 프랑스와, 우리가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에 관해 매우 중요한 선거”, “프랑스의 성공은 전 세계와 관련이 있다”며 마크롱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마크롱이 파리 루브르박물관 광장에서 당선 연설을 할 때는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 대신 유럽연합 상징곡인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졌다. 마크롱은 “앞으로 5년간 극단주의에 투표할 이유가 없어지도록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르펜의 집권 가능성이 결국 기우로 그치자, 서구 언론들은 포퓰리즘의 전진이 가로막혔다는 평가를 내놨다.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이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서구 엘리트 사회는 프랑스마저 포퓰리즘의 포로가 될까 걱정해 왔다. 반이민과 반이슬람을 내건 르펜은 3월에 러시아를 방문해 ‘코드’가 맞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서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도널드 트럼프의 세계가 열렸다. 난 이 위대한 국가들과 협력의 비전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유럽연합에 프랑스의 탈퇴 가능성은 영국의 이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65년 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연합의 역사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맞붙은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가 기본 골조다. 유럽연합 탄생을 주도한 것도 프랑스다. 영국은 1973년에야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했고, 화폐 통합에도 참여하지 않아 유로존 밖에 있었다. 프랑스가 빠진다면 유럽연합은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게 된다. 더구나 지금은 영국과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에서 다른 회원국들이 전열을 정비하는 시기다.
하지만 마냥 환호작약할 분위기만은 아니다. 르펜은 비록 마크롱한테 2 대 1의 점수차로 패했지만, 이번에 표출된 민족주의 성향이 유럽의 앞날에 어두운 전조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르펜에 앞서 대선 결선 진출에 성공한 극우 정치인은 국민전선의 창업자인 그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다. 장마리 르펜은 2002년 결선에 진출해 프랑스를 발칵 뒤집었다. 그러나 결선에서는 “파시스트한테 투표하지 말고 사기꾼한테 하라”는 구호가 퍼진 가운데 자크 시라크(82.2%)한테 17.8%의 득표율로 참패했다. 당시 극우정당에 대한 폭넓은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장마리 르펜이 불과 16.9%의 득표율로 1차 투표를 통과한 것은 사회당 후보 리오넬 조스팽 총리의 낮은 인기도에다 좌파 후보들이 난립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부지리를 누렸다면, 딸 르펜은 ‘자력’으로 결선에 올랐다. 득표율도 33.9%로 아버지의 두 배 가까이 된다. 르펜은 이번에 ‘포퓰리즘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와 국민전선은 비주류 극우정당에서 유력 야당으로 부상할 기회도 잡았다. 르펜은 표를 준 1100만 유권자를 가리켜 “역사적이고 엄청난” 숫자라고 밝히고, 당을 개혁해 총선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대선이 “애국자들과 글로벌주의자들”의 대결이었다고 규정했다. 이날 나온 해리스 인터랙티브의 여론조사 결과는 다음달 총선에서 마크롱의 앙마르슈(전진)가 26%의 지지를 얻어 다수당이 되고, 국민전선(22%)은 제1야당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선 결선에서 18~24살 유권자층이 다른 연령대보다 높은 44%의 지지를 보냈다는 추산도 르펜에게 고무적인 대목이다. 65살 이상 유권자들의 르펜 지지율은 20%에 그쳤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