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의 기적’의 세 목동 루시아 산투스(왼쪽부터), 프란시스쿠 마르투, 자신타 마르투.
꼭 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10월혁명이 일어났다. 이보다 반년 전쯤 포르투갈의 풀밭에서는 세 명의 목동이 ‘파티마의 기적’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파티마의 기적도 올해가 100돌이다. 유라시아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땅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과 대륙의 끝자락에서 퍼진 소년·소녀들의 목격담은 단지 발생한 해만 같을 뿐일까? 러시아혁명은 굳이 기념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은데 파티마는 지금 축제 분위기다. 그리고 묘하게 얽힌 파티마와 10월혁명의 인연도 다시 회자된다.
100년 만에 최연소 성인 반열에 오르는 목동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모 발현 100돌이 되는 5월13일 파티마를 방문해 수십만의 순례자들 앞에서 파티마 기적의 주인공인 프란시스쿠 마르투와 그 동생 자신타 마르투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한다. 두 사람은 사망 당시 각각 11살과 9살에 불과했다. 순교자가 아닌 아동이 성인 반열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지 가톨릭 교구는 10년 전부터 100돌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준비해 왔다.
성모가 발현했다는 장소에 건립된 성전과 파티마의 성모상.
교회가 세워진 이래 가장 기적적인 일로 꼽히는 파티마 성모 발현은 이 두 남매와 사촌인 루시아 산투스가 양을 치러 갔다가 목격했다는 일이다. 셋은 그 전해부터 천사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기적의 날, “태양보다 눈부신”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전쟁을 끝내려면 매일 기도해야 한다고 요구했단다. 당시 유럽은 1차대전의 전화에 신음하던 때였다. 이후로도 그해 10월까지 매월 13일에 성모가 발현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일러줬다는 게 파티마 기적의 줄거리다.
교황청은 여태껏 수백 건의 성모 발현 주장을 조사했으나 그 중 인정된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파티마의 기적에 ‘신빙성’을 더한 것은 그해 10월13일에 목격됐다는 ‘태양의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고에 수만명이 파티마 마을 근처 들판에 모였는데, 다수가 태양이 빙글빙글 도는가 하면 지구에 접근했다가 지그재그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광경을 봤다고 주장했다. 목격담을 뒷받침하는 사진도 없고, 일부 과학자들은 태양을 오래 쳐다봐서 생긴 착시라고 설명했지만 아무튼 파티마의 기적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톨릭 교회는 목동들의 주장을 처음부터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교회는 ‘사적 계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한 현지 주교는 1930년 “믿을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선언하고 ‘파티마의 성모’에 대한 경배를 허락했다. 파티마 마을은 성지가 됐다. 이후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파티마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교황청은 이 사건을 실재한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교황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가 파티마를 찾았고,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다.
세 목동들 중 프란시스쿠와 자신타는 유럽을 휩쓴 스페인독감으로 각각 1919년과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모 발현 당시 10살이었던 루시아는 성모가 두 사촌동생을 먼저 천국으로 데려가고, 루시아 자신은 예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좀 더 살게 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밝혔다.
세 가지 비밀,
소련에 대한 불길한 예언
루시아는 수녀로 살다 2005년에 98살을 일기로 숨졌고, 6개의 회고록 등을 통해 성모의 말씀을 전했다. 1941년, 성모가 파티마에서 세 개의 비밀 내지 예언을 전했다며 그 중 두 개를 공개했다. 성모가 세 번째로 나타났다는 1917년 7월13일에 보여줬다는 첫 번째 비밀은 “거대한 불의 바다”인 지옥의 환시다.
회고록 등을 통해 `파티마의 비밀'을 전파한 루시아 수녀와 만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두 번째 비밀은 1차대전 종식과 2차대전 발발, 러시아(소련)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루시아는 1938년 2차대전 발발 직전 유럽과 북미에서 광범위하게 관측된 오로라는 성모가 말한 재앙의 전조인 “이상한 빛이 번쩍이는 밤”을 뜻한다고 했다. 특히 러시아에 대한 부분은 이 나라를 악의 제국으로 간주한 교회와 서구 사회의 인식의 원형질을 보는 듯하다. 루시아는 사회주의와 무신론의 제국이 된 러시아가 회개하고 성모에게 봉헌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죄악을 퍼뜨리고 전쟁을 일으키며 교회를 박해할 것이라는 게 성모의 메시지라고 했다. 러시아를 정화시켜야 재앙이 끝난다고 했다. 루시아는 어렸을 때는 ‘러시아’가 여자아이 이름인 줄 알았다고 했다.
예언을 현실화하려고 총을 든 이들도 있었다.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은 공식적으로는 2차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일이 1941년 소련을 침공하자, 스페인인 1만8천여명이 ‘푸른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투입돼 소련군과 싸웠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2년 세계를 성모 성심에게 봉헌하면서 “러시아인들”을 특별히 언급했다. 그는 “지옥의 문은 절대로 승리하지 못한다”며 성모의 도움으로 무신론을 이길 것이라고 밝혔다. 무신론과 교회 박해를 비난하는 교황청에 맞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는 교황은 나치 협력자였다며 흑색선전 공작에 나서기도 했다.
레이건과 요한 바오로 2세
서방세계에서 소련 붕괴에 큰 기여를 한 두 사람으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꼽을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스타워즈 구상 등 군비 경쟁으로 소련을 물질적으로 밀어붙였다.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고국을 방문해 동유럽 사회주의를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어놨다. 455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밖에서 배출된 교황의 귀환에 구세주를 만나려는 듯 수백만명이 몰렸고, 폴란드인들의 반소련 감정은 비등점으로 치달았다. 1989년에는 교황이 13세기 보헤미아(체코 서부의 옛 이름) 공주 아그네스를 시성하고 며칠 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을 무너뜨린 벨벳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최근 레이건과 요한 바오로 2세가 알려진 것보다 소련 문제에 관해 더 밀착했으며, 파티마의 기적이 그 고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내용의 책이 발간됐다. 레이건을 집중적으로 탐구해온 미국 그로브시티컬리지의 폴 켕어 교수는 <교황과 대통령>이라는 책에서 두 사람이 파티마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소련에 맞서 의기투합했다고 평가했다.
레이건과 요한 바오로 2세는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공유했다. 레이건은 취임 69일 만인 1981년 3월30일 총격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몇 주 뒤인 5월13일에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서 터키 청년이 쏜 총에 맞았다. 기밀 해제된 방대한 문서와 레이건 측근들에 대한 취재를 토대로 책을 쓴 켕어는 두 사람이 1982년 6월에 만났을 때 ‘신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살려뒀다’는 내용의 대화를 했다고 전했다. 그 ‘목적’은 소련을 분쇄하고 철의장막 너머의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게 켕어의 설명이다. 레이건은 1985년 5월 포르투갈을 방문했을 때 “위대한 신앙의 성소”라며 파티마를 언급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서도 “파티마의 어린이들 같은 보통 사람들도 세계의 강력한 군대들과 정치인들보다 큰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1981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당시 유고슬라비아연방 소속) 메주고리예에서의 성모 발현 주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소련 붕괴는 신의 뜻인가 자기실현적 예언인가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를 파티마의 기적과 직접 연결시켰다. 교황이 총격을 받은 날은 파티마의 기적 축일이었다. 이 대목에서 세 번째 비밀이 등장한다. 애초 세 번째 비밀은 루시아가 비밀에 부치면서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3차 세계대전, 소련이 일으킨 핵전쟁, 세상의 종말이 내용이라는 무시무시한 추측이 꼬리를 물었다. 파티마에서 관광 가이드로 일한 적 있는 로런스 제임스 다우니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은 1981년 5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여객기를 납치하고서는 교황청에 세 번째 비밀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마침내 교황청이 2000년에 공개한 세 번째 비밀에는 “흰 옷을 입은 주교”가 총탄과 화살에 맞아 순교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루시아는 예언을 들을 당시 이 인물이 교황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총격 직후 병상에서 세 번째 비밀의 내용을 접하고서는 “흰 옷을 입은 주교”가 바로 자신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파티마의 기적'과 소련 붕괴 사이의 관계를 다룬 책 <교황과 대통령>의 표지.
<교황과 대통령>은 교황 암살 기도에 관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문서가 소련을 배후로 지목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암살 지시는 케이지비가 아니라 소련군 정보총국(GRU)이 내렸다는 게 조사 내용이라는 것이다. 켕어는 미국 교계 매체 <내셔널 가톨릭 레지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총격 치유 중에 파티마의 세 번째 비밀을 접하고서는 미래의 교황을 공격한다는 내용이 러시아 공산주의가 저지르는 죄악의 하나이며, 암살 기도에 소련이 연루됐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켕어는 “20세기 역사는 파티마의 성모가 경고한 바 있는, 1917년 볼셰비키 10월혁명 때문에 시작된 무신론적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며 “1989~91년까지 이어진 투쟁은 카롤 보이티야(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와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최종적으로 평화롭게 끝났다”고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루시아가 세상을 뜬 지 50여일 만에 선종했다.
파티마에 성모가 출현해 예언을 전했다는 주장을 믿을지 여부는 신앙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개념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맞는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굳게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현되는 예언을 말한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