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 헬무트 콜(가운데) 당시 독일 총리가 마거릿 대처(왼쪽) 영국 총리,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독일 본에서 열린 정상회의에 참석해 웃고 있다. 대처 영국 총리는 독일이 강대국으로 재부상하는 것을 경계해 독일 통일에 반대했었다. EPA 연합뉴스
독일 통일과 유럽연합(EU)이란 거대한 유산을 남긴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지난 1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
그는 1982년부터 1998년까지 20세기 최장기 독일 총리로 집권하면서, 45년간 냉전의 최전선에서 동·서독으로 분단됐던 독일을 통일로 이끌었다. 그는 평생 우파 기독교민주당 정치인이었지만, 사민당 총리였던 전임자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가 추진한 동독과의 화해 정책인 ‘동방정책’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결실을 맺었다.
베를린을 괴물처럼 나누고 있던 베를린장벽이 1989년 11월9일 갑자기 붕괴된 이후,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한 결단력으로 조기 통일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모스크바로 가서 독일 통일에 대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냈고, 동독 지도자들과 신속한 경제·사회 통합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으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지원도 확보했다.
그는 독일 통일을 실현하려면 미·소 양쪽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해 부시, 고르바초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도 친밀한 관계였는데, 이는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의 독일 통일 반대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힘이 됐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대처는 통일 독일이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해 “우리가 독일을 두번이나 패배시켰는데, 이제 그들이 또 돌아왔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콜 총리는 회고록에서 회상했다. 1990년 10월 독일은 마침내 통일이란 역사를 썼다.
그의 두번째 유산은 유럽연합이다. 그는 평생 ‘통합된 유럽 안에서의 독일 재건’이란 목표를 추구했으며, 1992년 유럽 통화 통합, 중앙은행 설립, 유럽시민권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의 주역이 됐다. 유럽연합과 유로는 통일 독일이 유럽연합 내에서 경제적으로 더욱 강성해지며 강대국으로 재부상하는 기반이 됐다.
1991년 기독교민주당 부대표로 처음 선출된 메르켈과 당시 콜 총리. EPA 연합뉴스
그의 또다른 정치적 유산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콜은 옛동독 신생 정당의 대변인 메르켈을 발탁해 통일 독일 초대 내각의 여성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메르켈은 한동안 ‘콜의 양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콜이 기민당 부패 정치자금 의혹 사건으로 위기에 처하자, 1999년 12월 기민당 사무총장이던 메르켈은 “당이 콜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그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 시기에 정치에서 물러나 2002년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한 콜은 건강 악화와 가족 불화설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6일 메르켈 총리는 콜에 대해 “독일과 유럽의 분열을 극복할 역사적 기회를 잡아, 제때에 제대로 일을 해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꿨다”고도 회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는 한 위대한 유럽인을 잃었다”고 추모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17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독일 통일의 주역인 콜 총리의 죽음이 안타깝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독일 국민에게 애도의 마음을 보내는 동시에 조전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콜 전 총리의 장례식은 유럽연합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18일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콜은 생전 그의 각별한공헌을 인정받아 유럽 명예시민이 됐다”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유럽차원의 국장을 추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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