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영국 런던 중심가 총리 관저 근처에서 그린펠 타워 화재 참사와 관련해 수백 명의 시위대가 보수당 정부와 테리사 메이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14일 런던 서부에 위치한 24층 아파트 그린펠 타워에서 화재가 발생해 17일까지 58명의 주민이 숨진 것으로 발표됐다. 런던/AFP 연합뉴스
런던 24층 아파트 화재가 규제 미비로 빚어진 참사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탈규제를 추진해 온 보수당 정부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뭇매를 맞고 있다. 메이 총리는 ‘가난한 희생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 사망자 58명으로 늘어 영국 경찰은 런던 서부 노스켄징턴 지역의 24층 아파트 ‘그렌펠 타워’에서 일어난 화재로 숨진 희생자가 17일(현지시각)까지 최소 58명으로 추정되며,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실종자를 사망자로 간주한 추정치로, 아직 건물 수색이 끝나지 않아 사망자가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비비시>는 사망자가 70명에 이를 것으로 봤다. 1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던 이 아파트에는 화재 당시 수백명의 주민이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로 70명이 넘는 주민이 부상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중 19명이 아직 입원 중이며 10명은 중태다. 화재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 “탈규제가 참사 불러” 보수당 뭇매 정부가 아직 화재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수색 및 인명피해 상황 파악도 늦어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건물 수색은 안전상의 이유로 중단됐다가 17일 재개됐다.
메이 총리는 화재가 일어난지 3일이 지난 17일에야 피해자 대표 15명, 지역 주민 등과 면담에 나섰다. 앞서 15일에는 화재 현장만 둘러보고 떠났다가 공분을 샀다. 메이는 피해자 면담 뒤 “긴급 서비스, 국민보건서비스(NHS) 등의 대응은 영웅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재난 뒤 초기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메이는 피해자 생필품 지원 등을 위해 500만파운드(72억5000만원)의 긴급기금을 지원하겠다고 16일 발표했고, 17일엔 필요시 추가 지원도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분노를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렌펠 타워 주민들은 “우리가 가난해서 무시당한다”며 분노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2013년부터 이 건물의 화재 위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부로부터 묵살당했고, 화재 이후에도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영국 런던 서부 노스켄징턴에 위치한 그렌펠 타워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와 정부 대처에 항의하는 수 백명의 시위대가 16일 켄징턴구청으로 몰려들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런던/EPA 연합뉴스
16일에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켄징턴구청으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보수당 물러나라!”, “정의 없인 평화 없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구청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17일 런던 총리 관저 부근에도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몰렸다.
건물 4층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화재에 취약한 외장재를 타고 올라가 15분만에 건물 전체를 뒤덮은 참사로 번진 것은 탈규제를 밀어부치며 안전 규제마저 소극적이었던 보수당 정부 탓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소방 전문가들은 수 년 전부터 특히 건물 외장재에 내화성이 강한 물질을 사용해야 하고 집합 건물에는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정부에 주장해 왔지만 묵살당했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이 신문은 “최근 몇 년 간 예산 절감과 탈규제를 중시하는 보수당 장관들 탓에 안전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고 보도했다. 경제지인 <파이낸셜 타임스>조차 “이번 화재는 보수당의 ‘규제 하나를 신설하면 기존 규제 세 개는 퇴출시킨다’는 터무니없는 방식에 기반한 ‘탈규제화’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탈규제는 이상적인 목표일뿐”이라며 “이 참사는 영국 사회 내 불평등과 긴축정책이 최빈곤층에 가한 충격에 대한 분노에 불을 붙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 시리아 난민·5살 유아 등 숨져 지금까지 신원이 공개된 사망자 3명중 한명은 5살 어린아이 아이작 섀워다. 부모, 3살 남동생과 함께 그린펠 타워에 거주하던 이 아이는 아파트가 연기로 휩싸이며 부모와 헤어진 것으로 보도됐다.
23살의 시리아 난민 청년 모하메드 알하잘리의 생명과 꿈도 불길에 타 사라져 버렸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2014년 영국에 와 토목공학을 공부하던 그는 14층에서 형제와 함께 살고 있었다. 화재 당시 대피하는 과정에서 형제와 헤어진 그는 다시 아파트로 돌아와 구조를 기다리며 2시간을 버티다 끝내 숨졌다. 구조를 기다리던 2시간 동안 그는 시리아의 부모님에게 전화하려 애썼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대신 친구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그가 “매우 착한 사람”이었다며 “그는 자신의 삶과 가족에 대한 목표며 포부를 가지고 영국에 갔다”고 밝혔다.
20층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던 24살 예술가 카디야 사예도 숨졌다.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을 정도로 재능있는 예술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실종 상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및 그린펠 타워 주변에는 실종자를 찾는 게시글과 벽보가 빗발쳤다. 실종자 중엔 생후 6달된 아기 등 많은 어린이와 노인, 그 가족이 포함돼 있으며, 상당수는 아랍계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