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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등록 2017-11-11 09:20수정 2017-11-11 17:48

[토요판] 뉴스분석 왜?
‘카탈루냐 문제’의 배경과 전망
지난 10월10일(현지시각) 카탈루냐 분리독립 지지자들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개선문 앞에 모여 대형 티브이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는 카를레스 푸지데몬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의 자치의회 연설을 듣고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지난 10월10일(현지시각) 카탈루냐 분리독립 지지자들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개선문 앞에 모여 대형 티브이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는 카를레스 푸지데몬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의 자치의회 연설을 듣고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카탈루냐’에 최근 전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왜 21세기 들어 카탈루냐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까.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성격과 전망을 짚어봄으로써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최근 스페인의 대표적인 ‘전통적’ 자치지역 가운데 하나인 카탈루냐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월1일 치러진 주민투표 결과를 근거로 카탈루냐 의회는 10월27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공식 선언했고, 이에 중앙정부는 자치권 박탈과 주정부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로 대응했다. 이후 거리에서는 연일 지지자와 반대자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스페인은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 40년 만에 최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의 상황은 이른바 ‘결정의 권리’, 즉 주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카탈루냐인들과, 헌법상의 규정을 근거로 이를 결단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국가’ 간의 충돌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왜 카탈루냐에서는 21세기 들어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의 ‘스페인 국가’는 중세 시대만 해도 서로 다른 왕국들의 집합체였다. 8세기 초 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된 영토를 수복해가는 과정(Reconquista)에서 지금의 스페인 영토에는 반도 중심부에 카스티야 왕국이, 북동부에는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곤 연합왕국이 자리잡았는데, 이 두 왕국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이 달랐다. 우선 언어가 달랐고, 인종적 구성, 정치적 성향, 주민들의 가치관도 달랐다.

이렇게 전통과 문화가 서로 다른 두 왕국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혼인으로 하나로 통합되어(1479년) 공동 군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두 정치체의 통합은 이론적으로는 서로 대등한 관계를 천명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카스티야는 아라곤 연합왕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토도 크고 인구도 많았다. 더군다나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시작된 ‘아메리카 사업’도 엄격히 말해 스페인 전체의 사업이 아니라 카스티야 왕국의 사업이었다. 향후 그로부터 예상되는 기회까지 생각하면 스페인 미래의 무게중심은 압도적으로 카스티야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변곡점

이렇게 출범한 스페인 국가는 처음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 영역에 고유한 정체성과 거의 완전한 자치가 허용되는 일종의 연방제적 형태를 유지했다. 아라곤 연합왕국(카탈루냐) 역시 합병되고 나서도 거의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양쪽의 갈등은 격화됐다. 양쪽의 갈등이 폭발한 게 바로 17세기 중반 카탈루냐인들의 반란(‘수확자들의 반란’)이다. 이 반란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카탈루냐인들의 최초의 민족주의적 봉기로 기억되고 있다.

1700년 카를로스 2세의 죽음으로 촉발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스페인 국가와 카탈루냐 지역 간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이 전쟁은 국제 전쟁이자 내전이기도 했는데, 여기서 카탈루냐는 패한 쪽에 서 있었고, 승리한 부르봉 왕조의 스페인 국가는 ‘정복자의 권리’를 이용해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해버렸다. 카탈루냐에서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는데, 그것은 먼저 문화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주요 목표는 오랫동안 침체와 몰락의 길을 걸어온 카탈루냐어를 되살리고, 카탈루냐 문화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은 20세기 들어 점차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20세기 초에는 산업자본가들의 보수우파적 민족주의가 지배적이었다면, 1920년대 이후로는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진보좌파적 민족주의가 지배적이었다. 1931년 제2공화국하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중앙의 공화주의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카탈루냐 지역 자치정부인 ‘제네랄리타트’를 구성하고, 1932년에는 자치법을 허용받았다. 그리고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공화 진영 편에 서서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내전은 1939년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코 정부는 ‘하나로 통일된 스페인 국가’의 이념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지역 민족주의 혹은 지역적 정체성을 근절하기 위해 강경일변도 정책을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카탈루냐인이 처형, 투옥, 추방됐다. 제네랄리타트는 즉각 폐지됐고,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 국기, 민속춤 등 카탈루냐의 정체성의 상징물들은 전면 추방됐다.

하지만 프랑코 정부의 억압이 공적 영역 밖에서까지 강제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민족주의적 열망까지 근절하지는 못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비록 수면 아래에서이기는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억압은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카탈루냐의 민족주의 공동체들의 사회적·정치적 결속을 강화해주는 결과를 만들어낸” 측면도 분명 있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연합왕국의 ‘통합’
영토 넓은 카스티야에 무게 실려
17세기 중앙집권 강화되며 갈등 폭발
프랑코 정부, 카탈루냐 정체성 억압

2003년 새 자치정부, 자치권 강화 시도
카탈루냐를 하나의 ‘네이션’으로 규정
중앙정부 부담과 혜택의 ‘괴리’도 불씨
현행 국내법상 독립 이루기는 어려워

독재체제 말기에 억압이 느슨해지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 운동은 문화적·근대적·진보적 성격을 띠었다. 독재체제에 반대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그리고 자치법 인정과 구속된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진보적인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이런 성격은 ‘에타’(ETA)라는 테러단체에 의해 주도된 바스크 지역의 폭력적 민족주의 운동과는 좋은 대조를 보였다.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스페인에서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지역 민족주의 운동은 프랑코 체제로부터 상속받은 중앙집권적 경향과,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과 광범한 지역 자치를 보장받고자 하는 전통적인 자치지역들 간의 갈등과 타협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해관계가 상반된 여러 정파 간의 타협의 산물인 1978년의 헌법은 지금까지 스페인 국가와 지역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법적 근거라 할 수 있는데, 이 헌법 제2조는 “헌법은 스페인 국가의 해체할 수 없는 통일성, 공통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모든 스페인인들의 파트리아(조국)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더불어 그것을 구성하는 ‘내셔널리티들과 지역들’의 자치권을 그리고 그들 모두 간의 결속을 인정하고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상당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하겠는데, 왜냐하면 국가의 ‘통일성’이 지켜져야 한다면서 동시에 ‘내셔널리티들과 지역들’을 인정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성’의 의미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29일(현지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카탈루냐는 스페인”이라는 문구가 쓰인 펼침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바르셀로나/AP 연합뉴스
지난 10월29일(현지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카탈루냐는 스페인”이라는 문구가 쓰인 펼침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바르셀로나/AP 연합뉴스

논란의 소지 있는 1978년 헌법 규정

카탈루냐의 자치권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법적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 1979년에 제정된 카탈루냐 자치법이다. 이 새 자치법은 제네랄리타트의 권한과 관련하여 그것이 “헌법과 자치법, 그리고 (카탈루냐) 주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자치법은 카탈루냐 주정부의 권한이 무엇보다도 헌법으로부터 나오고, 헌법 규정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항은 또한 스페인 민주주의에서 카탈루냐인을 포함하여 모든 스페인인들로 구성되는 단일한 주권자로서의 국민(demos)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카탈루냐 주민들은 스페인의 모든 시민들로 구성되는 국민의 한 ‘하위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면 카탈루냐 주민들의 정치적 권한은 카탈루냐인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국민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비록 카탈루냐인 다수가 어떤 선택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들은 스페인 내에서 소수이기 때문에 특별히 스페인 국가의 허가 없이는 일을 추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0세기 말까지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분리독립 요구가 카탈루냐 지도자들의 주된 목적이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2003년 11월16일 카탈루냐 선거에서 자치 문제에 더 적극적인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새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1979년 자치법보다 자치권이 훨씬 강화된 새 자치법 제정을 추진했는데, 이 새 자치법은 무엇보다도 재정 문제에서의 지역 자치권을 강화하고, 카탈루냐를 하나의 ‘네이션’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것과 달랐다. 그 이후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은 전통적인 목표인 ‘더 많은 자치권 확보’에서 분리독립 요구로 ‘질적인 도약’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카탈루냐 문제에 대해 가장 활발한 연구를 진행해온 학자 가운데 한 명인 기베르노 교수는 최근 상황을 촉발한 요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카탈루냐의 더 큰 자치 요구에 대해 중앙정부가 보인 부정적 태도이다. 둘째는 카탈루냐 주정부가 2003년부터 추진해온 새 자치법이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수정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2010년 그중 핵심적인 조항들이 스페인 헌법재판소에 의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아 보류된 점이 카탈루냐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셋째는 스페인 국가의 재정정책에 대한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인데, 현재 카탈루냐가 중앙 행정부에 기여하는 비율(약 20%)과 카탈루냐가 국가로부터 돌려받는 비율(14%) 간에 차이가 크고, 그로 인해 카탈루냐의 경제위기가 심화된 것에 대한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이 분리독립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유럽, 소수 민족주의 문제에 ‘불개입’

현재 카탈루냐의 민족주의자들은 하나의 ‘네이션’으로서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네이션’이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공통의 과거와 미래 프로젝트를 갖고 있으며, 자치권을 주장하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인간 집단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 네이션의 권리로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네이션으로서의 지위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자신들이 결정하겠다는 주장은 카탈루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주장이 현행법상 명백히 불법이라는 점이다. 스페인의 모든 현행법은 주민투표를 통해서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더군다나 카탈루냐인들의 주장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도 못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각국의 ‘소수 민족주의’ 문제를 각 국가 내부의 문제로 간주하고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결국 현행 국내법 혹은 국제법하에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얻어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카탈루냐인들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헌법을 개정하는 것일 텐데, 스페인 국가와 스페인인 다수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 또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카탈루냐인들이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을 통해 꾸준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국내 혹은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중앙정부를 압박하고, 결국 중앙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좀 더 많은 자치를 얻어내는 것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원중 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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