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8일 파리에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왼쪽)과 아미나 모하메드 유엔 사무부총장 사이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엘리제궁 누리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예루살렘=이스라엘 수도 선언’과 반이슬람 영상 리트위트를 통해 사실상 중동의 중재자 역할을 포기한 가운데, 서방의 중동 외교 공백을 메우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행보가 두드러지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10일 파리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선언은 “국제법에 반하고 평화 프로세스에 위험이 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 이후 첫 해외 순방길에 오른 네타냐후 총리의 면전에서 지구촌을 대신해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프랑스 24>는 네타냐후 총리의 11일 벨기에 브뤼셀 방문에 앞서, 마크롱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중단도 제안했다고 전했다. 물론 네타냐후 총리는 “평화로 이행하려면 팔레스타인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6일 알제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엘리제궁 누리집
1년 전만 해도 미국이 아닌 프랑스가 중동에서 ‘서방 외교’를 대표하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이 지역 6개국 대사조차 지명하지 않은 채 중동 외교를 사실상 진공 상태로 내팽개치고 영국과 독일도 국내 정치에 골몰하는 지금, 마크롱 대통령이 틈새를 메워가며 존재감을 키우는 셈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7일 카타르 도하를 방문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엘리제궁 누리집
찬반과 성패 논란이 있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잇따라 중동 문제에 개입해왔다. 지난 9일에도 중동 문제의 주도권을 쥐려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전화통화로 예루살렘의 지위 문제를 논의했다. 지난달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가 사우디 방문 중 돌연 사임을 발표해 ‘강제 사임’ 논란에 휩싸였을 때는 사우디를 방문해 중재를 시도하면서 하리리 총리 일가를 프랑스로 초대했다. 그는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 낀 하리리 총리가 사임하면 레바논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정파 헤즈볼라 쪽으로 기울 것을 우려했고, 사임을 번복하도록 해 사태를 봉합했다. 파키스탄·이라크·아프가니스탄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라이언 크로커는 <뉴욕 타임스>에 “과거에 미국은 레바논에서 주요 역할을 했지만, 사우디와 하리리가 우리에게 한마디도 없이 일을 벌였다는 건 무언가를 말해준다”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7월 파예즈 사라지 리비아 통합정부 총리와, 영토 3분의 2를 장악한 칼리파 하프타르 군사령관을 프랑스로 초청해 평화협상을 중재하기도 했다. 또 시리아의 ‘전후 정책’을 돕겠다고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일 파리에서 네치르반 바르자니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엘리제궁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깊숙이 발을 담갔다. 알제리를 130여년간 식민통치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함께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분할한 뒤 시리아와 레바논을 통치했다. 중동은 지금도 프랑스에 매우 중요하다. 프랑스산 무기의 2~4대 수입국은 사우디·카타르·이집트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주 카타르 방문 때 13억달러어치의 전투기 수출을 발표했다.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전직 국방장관 출신으로 아랍 국가들의 군부와 유대가 돈독하다.
하지만 프랑스가 미국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하기는 어렵다. 미국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합의 준수를 담보할 능력은 없다. 다만 외교 전문가들은 중동에서도 ‘미국의 세기’가 저무는 지금, 마크롱 대통령이 당분간 균형추 역할을 할 수는 있다고 기대한다. 주스트 힐터먼 국제위기그룹(ICG) 중동북아프리카 국장은 “마크롱은 미국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프랑스에 기회일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중국의 세기’에 서방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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