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 소재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청사.
현 국제 질서의 주축인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양안동맹 사이의 내홍이 깊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불거진 갈등이 ‘내정’ 사안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5대 경제대국 재무장관들은 미국 공화당 정부의 감세안이 국제 협정들을 어기고 무역을 위협해 워싱턴의 정책 다툼을 범대서양 분쟁으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11일 보도했다.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재무장관들은 백악관과 미국 재무부에 보낸 편지에서 공화당 주도 세제 개편안이 통과되면 보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때 애플 등 미국 기업들의 유럽연합 내 과세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유럽연합 쪽이 미국 국내의 입법 사안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개국 장관들은 세금 정책은 ‘국가 주권의 본질적 기둥들’이라 기본적으로는 개입할 의사가 없다면서도 “순수한 기업 활동에도 영향을 주는 조처들을 통해 이뤄진다면 우리는 강력한 우려를 가진다”고 밝혔다. 유럽 국가들을 우려하게 만든 내용은 미국 안과 밖의 기업 활동을 차별하는 조항들이다. 유럽 재무장관들은 이를 국제적인 세금 규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하원에서 논의하는 ‘내국소비세’는 미국 기업이 해외 자회사로부터 구매할 때 20%의 추가 부담금을 징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한은 이런 조항은 “세계무역기구가 제정한 규정들과 위배되는 차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재무장관 대리는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고, 세금 체계를 자신들에게 적합하게 만들 권리가 있다”면서도, 이는 국제 규정을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서한에 대해 미국 재무부 대변인은 “재무장관들의 견해에 감사를 표한다”며 “우리는 입법안을 마무리하려고 의회와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다”고만 답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11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유럽연합은 이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을 다시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 외교담당 고위대표는 이날 만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예루살렘의 최종 지위에 관한 협정 타결 전에는 이 도시를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다. 그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미래의 팔레스타인 국가 모두의 수도라는 것을 “유럽연합이 완전히 일치해”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또 유럽연합은 예루살렘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계속 인정할 것이라고 말해,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은 국제 합의 위반임을 시사했다. 앞서 유럽연합 외무장관들은 ‘예루살렘 선언’ 때 유럽을 방문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에게 이 선언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총리로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연합 외교 대표와의 회담을 위해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했으나 냉대만 받았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유럽 관계는 각종 이견으로 갈등이 커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에 유럽을 방문했을 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침공받으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개입한다는 안보 조약을 재확인하지 않으면서 양안동맹의 초석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 후 미국은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했다. 그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한다는 언급까지 했다.
이에 유럽연합의 주축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난 5월 나토 및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뒤 “우리(독일과 유럽)가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며 독자 노선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미-유럽 관계에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선언”(<워싱턴 포스트>)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독일의 대미 무역흑자 문제를 유럽연합 지도부와 얘기하며 “독일은 못됐다”고 비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