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한 자선행사장 입구 사진.
지난 18일 저녁, 런던의 도체스터호텔에서는 33년 전통의 뜻깊은 자선 경매 행사가 열렸다. 360명에 이르는 영국의 금융, 부동산 등의 업계 경영자와 정치인, 연예인 등 명사들이 참여했다.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과의 점심,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와의 티타임 등이 판매됐다. ‘프레지던트 클럽 자선 만찬’이라는 이 행사에서는 아동 병원 등에 기부할 200만파운드(약 30억원) 이상의 정성이 모였다. 여기까지만 알면 영국 유력 인사들이 따뜻한 마음을 모은 아름다운 행사로 보인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모두 남자로만 이뤄진 이 비밀스런 행사의 내막을 <파이낸셜 타임스>가 잠입 취재하면서 자선행사라는 이름의 환락 파티의 진상이 폭로됐다. 이 신문은 여성 리포터 2명을 호스티스로 위장해 행사에 들여보내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성추행이 난무한 파티의 모습을 전했다.
주최 쪽은 행사 참가자들 시중을 들 호스티스 130명을 투입했다. 주요 행사 진행 요원 섭외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선발을 맡았다. “키가 크고, 날씬하고, 예뻐야 한다”는 기준으로 선발한 이들이다. 파트타임 배우, 모델, 학생 등이 선발됐다. 보수는 일당 150파운드에 집에 돌아갈 때 쓸 택시 요금 25파운드였다. 이들에게 통지된 복장 규정과 주의 사항도 심상치 않았다. ‘섹시한 검은색 신발’을 가져오고 검은색 속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행사 현장에 도착하니 미용사들이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시켜줬다. 짧은 스커트 등 유니폼이 지급됐다. 손님이 너무 취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괴롭힐 수도 있다는 주의 사항도 전달됐다. 비밀 엄수 서약도 했다. 여성들은 입장에 앞서 화이트 와인 한 잔씩을 마셨다.
저녁 8시, 행사 시작에 맞춰 여성들은 키 순서대로 두 줄로 서서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무대의 좌·우에서 입장했다. 130명은 인사를 올린 뒤 각각 배정된 테이블로 향했다. 이들은 서로 모르는 테이블 착석자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돕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동안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무대에서는 흥겨운 공연이 진행됐다. 자리에 앉은 손님들은 옆에 선 여성들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음담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70살이 다 돼가는 남성은 옆자리의 19살 여성에게 성매매를 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정장을 입은 행사 진행요원들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손님을 접대하지 않는 여성들을 독려했다. 화장실 앞에서는 모니터하는 사람들이 여성들이 화장실 안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도록 감시했다.
밤 10시에 경매 본행사가 시작됐다. 랜드로버 차량부터 아동 병원에 기부자 이름을 새겨넣는 것까지 경매 대상으로 올라왔다. ‘당신의 아내한테 양념을 더하라’라는 제목으로 유방 확대 시술 등 성형수술도 경매 물건으로 올라왔다. 스트립 클럽 입장권도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 한숨 돌릴 시간을 얻었는데, 누구는 손님한테서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거액의 팁을 제안받았다고 했고, 또 다른 여성은 너무 취했다고 털어놨다. 이후 볼룸 옆의 보다 작은 방에서 ‘애프터 파티’ 시간으로 이어지면서 행사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됐다.
샴페인, 위스키, 보드카에 취한 상태에서 댄스 파티까지 이어지면서 곳곳에서 다리와 허리를 만지는 등 부적절한 신체 접촉이 발생했다. 한 손님은 이 호텔의 자기 방으로 가자고 했고, 어떤 이는 자리에서 성기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한 남성은 여성에게 샴페인을 따라주면서 “당신 속옷을 벗기고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게 하고 싶다”고 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파티의 진상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충격을 받았고,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데 자선행사라는 이름으로 이런 파티가 열린 것은 충격적이라고 했다. 여성들을 투입한 쪽에서 미리 입단속을 시키면서 주의 사항을 전달한 것을 보면 이런 관행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행사를 연 ‘프레지던트 클럽’은 “<파이낸셜 타임스> 리포터들 주장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행동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철저히 조사해 신속하게 적절한 조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