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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브렉시트가 영국의 ‘보편적 건강보험’을 망가뜨리고 있다

등록 2018-02-06 16:54수정 2018-02-06 17:31

영국 5개 야당 의원 100여명 공개 서한에서
‘브렉시트가 영국 의료 시스템에 가장 큰 위협’ 경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편적 건강보험 시스템 중 하나인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물결 속에 위기에 처했다. 영국의 야당 정치인 100여명은 ‘브렉시트가 영국 의료 시스템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설명을 보면, 지난 4일(현지시간) 영국 5개 야당(노동당, 자유민주당, 스코틀랜드 국민당, 녹색당, 웨일스 민족당) 소속의 유럽 의회 의원 및 영국 하원의원 등 선출직 의원 100여명은 브렉시트가 영국 의료 시스템의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하는 서한을 공개했다. 해당 서한에서 이들은 브렉시트의 위협으로 인해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가 민영화 수순을 밟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 브렉시트 뒤 건강보험에 더 투자한다는 거짓말

이들은 먼저 브렉시트 이후 국민보건서비스에 더 많은 공적 자금을 투여할 수 있다는 유럽연합 탈퇴 찬성파의 주장을 반박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기 전인 2016년 탈퇴를 주장하는 쪽인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 등은 “브렉시트 이후 EU에 매주 내는 분담금 3억5000만 파운드(현재 약 5359억원)를 국민보건서비스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날 서한을 보낸 의원들은 “국민투표 이후 낮아진 경제성장률로 인해 비슷한 정도의 재원을 잃었다”며 “이미 이런 영향으로 세수가 낮아지고 있고, 그 결과 국민보건서비스를 위한 재원은 적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브렉시트로 인해 복지 서비스가 증진될 것이라는 ‘망상’은 투표 직후 브렉시트 찬성파 쪽에서 먼저 발뺌을 하고 나선 바 있다. 2016년 6월 보리스 존슨과 함께 탈퇴 찬성을 주장하던 나이절 패라지 당시 영국독립당(UKIP) 대표는 영국방송협회(BBC)에 출연해 “3억5000만파운드를 건강보험에 충원하겠다는 약속을 보장하느냐”는 질문에 “할 수 없다. 난 그런 주장을 한 적 없다”고 발뺌한 바 있다. (▶ 관련 기사 : 영국에서도 투표 뒤, ‘공약’ 발뺌)

■ 브렉시트 이후 유럽 출신 의료 인력 유출도 문제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서 유럽 국가 출신 의료 인력들이 빠져나가게 되는 상황도 영국 의료 시스템에 위협이 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국 5개 야당 소속 의원들은 유럽의회 소속의 중요한 보건 기구와 유럽 국가 출신 의료진들이 자국으로 철수하면서 일어날 인력 부족 사태 역시 심각한 위협이라며 “(영국에서) 유럽연합 국적자의 지위가 불안정한 상황이 길어지고, 파운드의 가치가 떨어지면 유럽 출신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곳에서 떠날 것”이라고 의료진의 ‘탈(脫)영국’을 우려했다.

유럽연합 소속 국적 의료진의 ‘탈영국’은 이미 심각한 문제다. 영국의 의료시스템은 오랫동안 만성적 인력부족 사태를 유럽연합의 자원들로 채워오며 버텨왔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2017년 11월 보도를 보면, 유럽 대륙 출신의 인력이 런던에서 일하는 국민보건서비스 소속 간호사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런던 외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약 7%에 달한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다양한 이유로 영국 국민건강보험 소속이 된 이들은 영국 의료 시스템을 지탱하는 필수 인력이다.

수치상의 데이터만 문제인 건 아니다. 브렉시트로 인한 외국인 의료진의 감정 변화도 영국 의료 시스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해당 보도에서 의료진들이 외국인 노동자로서 겪는 감정적 변화가 다섯 단계에 걸쳐 나타난다며 프랑스 출신 의사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런던 외곽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시릴 노엘 박사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 때문에)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이후 ‘괜찮아.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을 거야’라며 거부의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폴란드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칼에 찔리고, 핀란드인 교수가 추방 경고장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며 ‘분노’의 단계로 옮아갔다”고 설명했다. (핀란드 교수의 추방 경고장은 이후 당국의 오류로 밝혀졌다.) 해당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노엘 박사는 “나를 내쫓는 데 찬성의 표를 던진 사람들을 도우며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고 밝혔다. ‘분노’ 이후의 단계는 ‘우울’과 ‘승인’이다.

지난해 2월 영국 의료협회가 발표한 조사를 보면, 영국에서 일하는 의사 유럽경제 지역(EEA) 출신 의사 5명 가운데 2명은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영국을 떠날 예정이라고 답한 바 있다. 2015~2016년 기간 중 영국 간호사산파협회(Nursing and Midwifery Council)에 등록된 유럽 출신의 간호사 가운데 등록을 취소한 인원이 2435명이었으나, 2016~2017년 같은 기간에는 4067명으로 67%나 증가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5일에 올린 트위트. 사진 트위터 갈무리.
도널드 트럼프가 5일에 올린 트위트. 사진 트위터 갈무리.
때마침 보편적 성격의 건강보험인 ‘오바마 케어’ 폐기를 추진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국의 의료보험 체계를 비판하고 나선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5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에 “영국에서는 보편적 건강보험이 망가지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민주당은 미국에서 보편적 건강보험을 추진하려 한다”며 영국의 의료보험 체계를 공격하고 나섰다. 트럼프의 이러한 발언은 이날 폭스뉴스에 출연한 나이절 패러지 전 영국독립당 대표가 “영국 정부의 이민 정책 때문에 (국민보건서비스의) 서비스 대상이 늘어났다. 이 때문에 의사와 의료시설이 부족해진 것”이라고 주장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해당 보험체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선동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가디언>은 ‘영국인은 연간 평균 4192달러(약 456만원)의 의료비를 들여 81.6년의 기대수명을 산다. 반면 인당 평균 9892달러(1077만원)를 지출하는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OECD의 자료를 보면, 2015년에 태어난 영국인의 기대수명은 81.0살, 한국인은 82.1살, 미국은 78.8살이다.

제러미 헌트 영국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 “해당 시위에 나선 사람 누구도 2800만 명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나라(미국)에는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의) 국민보건서비스가 난항을 겪을 수도 있지만, 통장 잔고와 상관없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건강보험을 만든 국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헌트의 발언처럼 1948년에 시작된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는 ‘보편적 건강보험’의 시초격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트럼프의 발언이 영국의 의료시장을 노린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허프포스트 UK’의 보도를 보면, 영국의 노동당 의원 스티븐 다우티는 “트럼프의 트위트는 우리의 건강보험 시스템과 그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노력의 시작에 불과하다”며 “브렉시트로 영국 정부는 미국과의 무역 협정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고,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대통령답게 우선 미국의 거대 제약사와 의료업체들의 편에서 국민보건서비스에 최고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브렉시트의 위협에 대해 경고한 100여명의 의원들은 같은 서한에서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이러한 중압이 계속된다면 민영화에 대한 압력 역시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세회 기자 sehoi.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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