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초기인 1940년, 나치는 유대인 말살을 실행할 ‘죽음의 수용소’ 부지의 하나로 폴란드 남부에 육군 막사가 있던 아우슈비츠를 선택한다. 1945년 종전까지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400만명이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거나 가스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우슈비츠를 포함해 폴란드 내 11곳에 수용소가 세워졌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폴란드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법안에 6일 서명하면서 유럽 내 ‘역사 세탁’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를 ‘폴란드의’ 수용소라고 언급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벌금이나 최대 징역 3년에 처해진다. 나치 만행에 대해 폴란드나 폴란드인에게 공동 책임을 묻는 표현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두다 대통령은 “우리에겐 역사적 진실에 대한 권리가 있다”며 “폴란드와 폴란드인들의 좋은 이름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 정부는 당장 반발했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이 법안이 표현의 자유와 학문 연구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비판했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펄쩍 뛰었다. 폴란드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달으면서, 폴란드 정부는 이스라엘 교육장관의 방문 계획을 취소시켰다. 두다 대통령은 폴란드인의 개별적 전쟁 범죄를 증언하는 것은 막지 않겠다며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다. 또 헌법재판소에 질의해 판단을 구하겠다고 덧붙였다.
폴란드 쪽은 나치에 협력한 정부가 꾸려진 적이 없고, 폴란드인들 중 유대인 300만명을 포함해 약 600만명이 살해당했다며 최대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유대인 탄압에 가담하거나 조력한 이들이 상당수 있는데도 ‘폴란드 국가’뿐 아니라 폴란드인들의 책임을 언급하는 것조차 불법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을 구한 폴란드인들이 있는 반면 스스로 학살에 나선 폴란드인들도 있다. 1941년 7월 예드바브네에선 폴란드인들이 유대인 340명을 헛간에 가두고 불을 질러 살해했다. 또 1946년 종전 후 키엘체에선 전쟁 통에 살아남은 유대인 42명이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했다.
특히 역사를 부정하는 시도가 최근 유럽 내 우파 민족주의 확산 과정에서 이어진다는 점이 우려를 키운다. 지난해 4월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프랑스는 벨디브 사건에 책임이 없다”면서, 나치에 협력하던 비시 정권 시기를 두고는 “프랑스가 아니다”라고 발뺌해 논란이 됐다. 벨디브 사건은 1942년 7월 파리 경륜 스타디움에 유대인 1만3천명을 억류했다가 나치 수용소로 보낸 일을 말한다.
러시아에도 자국과 자국민들의 전쟁 범죄 책임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법률이 있다. 러시아의 전신인 옛 소련은 애초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해 독일과 함께 이 나라를 반분했다. 하지만 러시아 법률은 소련을 침략자로 부르는 것을 금지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루지 않은 전쟁 범죄를 언급하는 것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소련은 나중에 독일의 침공을 받았고 결국 전승국 지위를 누렸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문제가 된 사건이 없었다.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 정부, 프랑스 극우 등은 자신들은 피침략국이었기 때문에 완전무결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뉴욕 타임스>는 폴란드 정부의 이번 조처를 유럽연합(EU)과 사법부 독립권 문제로 다투는 과정에서 ‘주권’을 되찾겠다는 명분에 따라 벌인 논쟁적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폴란드 정부가 2차대전 전쟁 범죄를 주기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유럽연합 ‘수장’인 독일을 겨냥한 공격이라고 분석했다. 얀 그라보프스키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는 “폴란드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영합한 법률”이라며 “민족주의자들뿐 아니라 폴란드 전체 사회가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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