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다 살해당했다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발표한 러시아 기자 아르카디 바브첸코가 30일 수도 키예프 기자회견장에서 러시아 정보기관 쪽의 암살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특수 작전’을 벌인 것이라고 발표하며 눈물을 참고 있다. 키예프/AFP 연합뉴스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바실리 그리착 우크라이나 보안국장은 30일 오후 키예프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기자 아르카디 바브첸코(41)에 대한 암살 시도를 특수작전으로 차단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19시간 전에 숨진 것으로 알려진 바브첸코를 연단으로 불러냈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바브첸코의 ‘부활’에 기자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바브첸코는 격앙된듯 울먹이다 “여러분이 동료를 묻을 때 느꼈을 끔찍한 감정을 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사과했다.
그리착 국장은 ‘깜짝 쇼’의 이유가 암살범을 잡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정보기관 쪽이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그가 죽은 것처럼 꾸며 암살범을 유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 당국에 포섭된 우크라이나인 남성이 4만달러(약 4300만원)를 받아 1만달러를 챙기고 범행에 나설 예비역 군인에게 3만달러를 줬다고 말했다. 이 남성을 체포하는 영상도 공개했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바브첸코를 만나 “당신과 가족 신변을 더 강력히 보호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보안당국은 두 달가량 이 작전을 준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바브첸코는 한 달 전 살해 음모를 듣고 작전에 협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런 식의 위장이 어떻게 암살 시도 저지로 이어졌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앞서 우크라이나 경찰은 30일 오전, 바브첸코가 전날 집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의심의 눈길은 러시아로 향했다. 바브첸코가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반군 사이의 ‘돈바스 전쟁’ 등 러시아가 연루된 여러 전쟁을 비판적으로 보도했고, 2016년 시리아 파병 러시아군 위문행사를 가던 군용기 추락 사건에 대한 글을 에스엔에스(SNS)에 올려 큰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변 위협을 피해 우크라이나로 이주한 뒤 <에이티아르>(ATR) 방송 기자로 일하며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시리아 내전 개입을 비판했다. 과거에도 블라디미프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기자들의 의문사가 이어졌고, 3월에는 이중스파이 출신으로 영국에 살던 러시아인 부녀가 신경물질 테러를 당한 사건도 일어난 터라 러시아는 더 의심을 받았다.
러시아는 자작극임이 드러나자 반발했다. 마리아 자카로바 외무부 대변인은 “바브첸코가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뉴스”라면서도 “우크라이나는 선전 효과를 위해 얘기를 꾸며냈다”고 비난했다.
바브첸코는 에스엔에스(SNS)에 “푸틴 대통령의 무덤에서 춤춘 뒤 96살에 죽을 것”이라며 러시아 쪽을 조롱하는 글까지 올렸다. 이번 소동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적대를 보여주는 한편의 희비극이었다.
오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던 세계 언론도 허탈하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성명을 내어 “기자가 다시 나타난 건 기쁘지만, 우크라이나 보안기관이 진실을 갖고 장난친 것은 유감이다”, “정말 필요한 계획이었냐”고 따졌다.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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