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인터뷰 내용을 보도한 영국 타블로이드 <더 선>의 뉴스 페이지.
13일 오전 11시(현지시각).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위해 그의 별장용 관저인 체커스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소 민망한 표정이었다. 그는 전날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에 공개된 인터뷰를 “후회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애써 무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한 메이 총리는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침착함을 유지하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이 11~12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동맹국들을 호되게 나무란 데 이어 혈맹인 영국에도 강펀치를 날렸다. 그는 11일 유럽연합(EU) 중심국인 독일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늘린다며 “(독일은) 러시아의 포로”라고 비난한 데 이어, 불과 이틀 사이에 유럽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나토 정상회의를 마친 뒤 12일 오후 영국에 도착했다. 메이 총리는 그를 위해 런던 서쪽 옥스퍼드셔주 블레넘궁에서 환영식과 환영 만찬을 베풀었다. 둘이 손잡고 다정하게 걷는 장면도 연출했다. 그러나 만찬이 끝날 즈음 <더 선>이 트럼프 대통령을 인터뷰한 내용이 공개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 오전(현지시각) 영국 총리의 별장용 관저인 체커스에 도착해 테리사 메이 총리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공개된 영국 언론 <더 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막말을 퍼부었기 때문인지 메이 총리의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 에일즈베리/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에 대한 메이 총리의 계획은 “미국과의 협정을 아마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 총리의 ‘소프트(온건한) 브렉시트’를 비판하면서, 유럽 공동시장에 남겠다면 미국과는 새 무역협정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내년 3월 브렉시트를 앞두고 기존 규정을 존치시켜 공동시장에 남자는 ‘소프트 브렉시트파’와 완전히 갈라서자는 ‘하드(강경한) 브렉시트파’가 대립하고 있다. ‘소프트 브렉시트’에 반발해 8일 보수당 강경파인 데이비드 데이비스 브렉시트 장관이 사임한 데 이어 9일에는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도 사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사실 테리사 메이에게 그것(브렉시트)을 어떻게 할지 말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도 했다. 또 영국이 메이 총리 식으로 유럽연합에 접근하면 “미국과 중요한 무역 관계는 아마 끝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메이 총리의 라이벌인 존슨 전 장관에 대해 “훌륭한 총리가 될 것”이라며, 그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킬 인물로 평가했다.
이는 동맹국 정상에 대한 노골적 공격이자 영국 내정에 대한 개입이었다. 세라 월러스턴 보수당 의원은 “분열적이고, 개 호루라기(dog whistle) 같은 수사”라며 “트럼프의 세계관에 동의하는 것이 (자유무역)협정의 대가라면 그것은 지불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가디언>도 “트럼프가 외교 수류탄을 터뜨렸다”고 분노했다.
결국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이 뒷수습에 나섰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메이 총리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존경한다”, “대통령은 영국 총리의 훌륭한 환대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도 전날 둘이 어떤 얘길 나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오늘 무역과 안보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우리 관계는 매우 매우 강하고, 매우 매우 좋다”며 “자세한 질문은 이후 기자회견 때 받겠다”고 말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인터뷰와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나는 (메이) 총리를 비난하지 않았다. 나는 총리를 많이 존경한다. 전체적으로 총리에 대해 좋은 얘기들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가짜 뉴스였다”라고 발뺌했다.
런던 시민들이 13일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띄워 올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풍선. 트럼프 대통령을 말썽꾸러기 어린 아이처럼 묘사했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영국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런던 시민들은 국회의사당 부근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철부지 아이처럼 묘사한 6m 높이의 대형 풍선을 날렸다. 미국 언론인 <뉴욕 타임스> 역시 “엄포를 놓고, 대치하고, 요구한 다음에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하는 게 트럼프의 전형적인 연기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정의길 선임기자,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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