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9일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총리 임기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기민련 누리집
13년간 유럽을 이끌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퇴장하고 있다. 그의 퇴장을 촉발한 거센 극우 바람 앞에서 유럽은 2차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안팎의 위기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9일 오는 12월의 집권 기민련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또 자신의 이번 4번째 총리 임기가 마지막이라고도 확인했다. 그는 2021년 총리 임기가 끝나면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그동안 집권당 대표와 총리직은 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자신이 당대표에서 물러나도 남은 총리 임기를 채우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메르켈의 예고된 퇴장은 최근 잇따르는 지방선거 패배가 직접적 원인이다. 이는 메르켈이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때 취한 관용적 난민 수용 정책으로 촉발됐다. 독일에만 약 100만명 이상의 난민을 수용한 그의 난민 정책은 독일 내에서 심각한 사회 분열과 보수층의 이반을 촉발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 등 신생 극우정당과 신나치 등의 발호를 불렀다. 이는 지방선거에서 극우파의 부상과 기존 정당들의 전후 최대 패배로 이어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9일 베를린 기민련 당사에서 헤세 주 선거결과를 놓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이날 오는 12월 전당대회에서 대표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총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그의 당대표 출마 포기 직전 치러진 헤센주 선거에서 기민련은 지난번 선거보다 11%포인트가 떨어진 27%의 득표율로 1966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대연정에 참여중인 사민당은 19.8%로 전후 최저를 기록했다. 반면, ‘독일을 위한 대안’은 13%, 녹색당은 사민당에 근접한 19.5%를 얻었다. 기성 정당들에 실망한 보수층은 ‘독일을 위한 대안’으로, 진보층은 녹색당으로 옮겨간 것이다.
대연정을 구성 중인 기민련 및 사민당은 메르켈의 남은 총리 임기 수행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당장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민련-사민당 대연정 지지율은 하락 추세이다. 특히 사민당의 지지율 하락이 가파르다. 애초부터 대연정 참여에 내부 반대가 심했던 사민당이 내년에 유럽의회 선거 등을 앞두고 ‘야당 정체성’ 회복을 위해 대연정 탈퇴를 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경우, 독일은 조기총선으로 들어가, 메르켈은 중도 하차를 할 수 있다.
메르켈의 지도력 쇠퇴는 최근 서구의 격변과 불안정을 상징한다.
첫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서구의 지도력 공백과 불투명성의 가속화다. 2000년부터 기민련 대표로, 2005년부터는 총리로 재직해온 메르켈은 독일의 최장수 총리를 노릴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큰 지도력을 행사해온 정치인이다. 그 배경에는 유럽연합(EU)의 최대 국가인 독일의 위상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신중하고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지도력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동맹을 훼손하고, 이민 등 국내 문제에서 극우적인 노선을 걷자, 메르켈은 서구의 지도력 공백을 메우는 마지막 보루로 인식됐다. 트럼프의 유럽에 대한 비난이 가속화되던 지난해 그는 “유럽인들은 이제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도 이제 난민 문제로 촉발된 극우 바람 속에서 퇴장을 앞둔 신세가 됐다.
둘째, 유럽 통합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난민 문제는 유럽연합 내에서 영국의 탈퇴 및 다른 회원국들의 동요를 촉발했다. 유럽연합과 영국은 탈퇴 방식을 놓고 아직 씨름 중인데, 유럽연합의 실질적 지도자 메르켈의 약화는 양쪽 모두에게도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문제다. 주요 회원국인 이탈리아는 예산안 문제로 유럽연합에 등을 돌리고, 헝가리 역시 극우 총리가 일찌감치 탈퇴를 으르고 있다.
유럽연합은 독일-프랑스 연대에 기반한다. 이 연대에서도 더 큰 지분을 가진 독일에서 유럽 통합을 찬성하는 기존 정당들의 약화는 통합의 동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유럽연합을 위기로까지 밀어넣을 것이다. 특히 안정된 지도력으로 포용력 있게 회원국들을 감싸던 메르켈을 대신할 인물을 당분간 찾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셋째, 2차대전의 반성 속에서 우러난 유럽의 관용과 다원주의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메르켈은 중도보수 정치인이기는 하나, 유럽의 어떤 진보정당 지도자보다도 관용과 다원주의를 옹호해왔다. 이는 유럽을 2차대전 전의 분열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전후 유럽 지도자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난민 문제로 촉발된 극우 바람에 좌초된 메르켈의 지도력은 유럽의 관용과 다원주의를 2차대전 이후 최대 위기에 처했음을 말해준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