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유럽연합(EU) 예산을 4배로 늘려 불평등에 대처하자는 유럽 지식인 선언이 나왔다. 극우 포퓰리즘이 확대되고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시위로 불평등에 대한 항의가 커지는 가운데, 전 유럽 차원의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21세기 자본>으로 불평등 문제를 파헤친 토마 피케티를 비롯해 6개국 지식인 50명은 대기업과 부유층 증세 등으로 연간 8000억유로(약 1031조원)의 예산을 확보해 불평등과 기후변화, 이주 문제에 대처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10일 이런 내용의 ‘유럽 민주화를 위한 선언’을 <가디언>·<르몽드>·<슈피겔>에 발표했다. 스페인 포데모스당 지도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이탈리아 전 총리인 마시모 달레마, 벨기에 과학자이자 샤를루아의 사회주의자 시장인 폴 마녜트,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의 보좌관이던 마이클 제이컵스 등이 서명자다.
이들이 제안한 유럽연합 예산 규모는 총 국내총생산의 약 4%에 해당하고, 현재 예산의 4배에 이른다. 3000억유로는 유럽 전역의 법인세를 37% 단일세율로 인상해, 2000억유로는 소득세 인상(연 소득 10만유로 이상은 추가 10%, 20만유로 이상은 추가 20%)으로 조달하는 내용이다. 또 2200억유로는 부유세(100만유로 이상 개인 자산에 추가 1%, 500만유로 이상에는 추가 2%)로 마련하자고 했다. 나머지 800억유로는 톤당 30유로의 탄소 배출세로 조달하자고 했다.
이렇게 늘린 예산은 4000억유로는 인구 비례에 따라 회원국들에 배분하자고 했다. 2000억유로는 성장과 일자리 증대를 위한 혁신·연구·개발, 800억유로는 기후변화 대처를 위한 녹색기술 개발에 투입하자고 요구했다. 또 800억유로는 난민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이주 기금으로, 400억유로는 농업·제조업의 녹색경제 이행을 돕는 데 쓰자고 했다.
이들은 선언에서 유럽의 제도와 기구들이 부자들에게 이익을 주는 난관에 빠졌다며 “브렉시트 및 몇몇 국가 선거에서 반유럽연합 정부의 등장으로 유럽연합은 더 이상 예전처럼 계속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선언은 “우리는 현재의 유럽에 대한 근본적 변화 없이 단순히 다음 일탈이나 추가적 붕괴를 기다릴 수 없다”며 행동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진보 성향의 선언자들은 외국인과 난민을 표적으로 삼는 운동을 비판하면서도 “골수 자유주의와 모든 것으로의 경쟁 확산”을 지지하는 쪽도 비난했다.
이들은 증액된 예산은 유럽의회가 감독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유럽연합의 예산 편성과 집행은 회원국 및 유럽연합 집행위가 통제한다. 이들은 선거로 구성되는 유럽의회가 실질적으로 예산 승인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유럽 지식인들이 불평등 감소를 추구하는 획기적 제안을 내놓은 배경에는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국가적 차원의 불평등 대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취임 뒤 유럽연합의 주축인 프랑스와 독일은 법인세 조정뿐 아니라 디지털 과세에 대한 공통 입장 수립을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연임 포기 및 프랑스 시위 사태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2014년에는 유럽연합 10개 회원국이 주식 및 파생상품 등 금융상품 거래에 과세하는 ‘로빈 후드세’를 입안했으나 일부 국가들이 탈퇴하면서 역시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