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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독장미’에 케냐 여성 노동자의 눈물이 깃들다

등록 2020-02-01 11:20수정 2020-02-02 16:54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⑭ 장미를 사지 않는 이유

케냐, 세계 4번째 큰 절화 생산국
EU 수입 절화 38%를 공급하지만
장미농장 일꾼은 월 100유로 받아

깨끗한 물을 철저하게 통제해
아이들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장미 성장 촉진하는 화학물질 탓에
여성 노동자는 유산하고 암 앓기도
지난해 5월 케냐와 독일 활동가들로 이뤄진 ‘독장미’ 프로젝트 팀원들이 베를린에서 행사를 열고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 채혜원 제공
지난해 5월 케냐와 독일 활동가들로 이뤄진 ‘독장미’ 프로젝트 팀원들이 베를린에서 행사를 열고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 채혜원 제공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 투쟁하지만 장미도 원합니다/ 함께 가면 더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여성들이 맞서 싸우면 마침내 모든 이들이 해방될 것입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다양한 페미니즘 관련 집회에서 종종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다. 노래 제목은 ‘빵과 장미’(Brot und Rosen). 1912년 1월, 미국 로렌스의 한 섬유공장에서 노동자 1만4000명이 굶주림과 아동노동 문제에 맞서 투쟁했을 때 부른 노래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거리와 일터, 집회 등 곳곳에서 이 노래를 불렀고, 이후 파업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깨끗한 물은 사람이 아닌 장미를 위해

생존권을 뜻하는 ‘빵’ 외에도 존엄을 뜻하는 ‘장미’도 원한다는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외침을 독일 집회에서는 독일어 노래로 부른다.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Wir wollen Brot, aber auch Rosen!)고. 하지만 오늘날 독일에서 장미는 ‘존엄’이 아니라 ‘노동 착취의 산물’이다. 그 이야기는 케냐 장미농장에서 시작된다.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2015년 케냐에서 독일로 온 제인은 1년 넘게 장미농장에서 일했다. 다 자란 장미를 잘라 운송 상자에 싣는 일을 주로 맡았다. 그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되게 농장에서 일해서 번 돈은 한달에 100유로(약 13만원). 장미농장은 도심에서 약 100㎞ 떨어진 작은 마을에 있었다. 농장 근처에 살며 일해야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농장 근처에서 살며 월세를 내고, 아이들은 농장 옆 학교에 다녔다. 살림살이도 마을 가게에서 사들였다. 이들 집과 학교, 마을 가게 모두 농장 소유주인 기업에서 운영했다. 기업이 한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깨끗한 물에 대한 소유권’이 큰 문제라고 제인은 지적했다. 장미농장 소유주가 마을의 깨끗한 물을 철저하게 통제하다 보니 정작 주민들은 깨끗한 물을 쓸 수 없었다. 적은 물로 여러 가족이 생활해야 했고, 이로 인해 여러 아이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깨끗한 물은 사람이 아닌 장미를 위해 사용됐다.

아름다운 장미는 케냐 여성 노동자를 착취한 산물이기도 하다. 지난여름 베를린의 한 공원에 핀 장미 모습. 채혜원 제공
아름다운 장미는 케냐 여성 노동자를 착취한 산물이기도 하다. 지난여름 베를린의 한 공원에 핀 장미 모습. 채혜원 제공

케냐는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콰도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절화(cut flower) 생산국이자 아프리카 최대 꽃 수출국이다. 유럽연합(EU)으로 수입되는 절화의 약 38%가 케냐에서 온다. 케냐 꽃을 수입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네덜란드와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다. 1990년 이래 케냐의 꽃 수출량은 점점 늘어나 2017년 15만9961t에 이르렀으며, 수출액 규모는 케냐 돈으로 822억실링(약 9600억원)이 넘는다.

꽃 산업이 이처럼 점점 거대해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계 문제와 천연자원 및 담수 개발, 장미 재배에 사용되는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 역시 심각해지고 있다. 케냐와 독일 여성 활동가들은 이 문제를 알리기로 뜻을 모았고, 케냐 장미농장이 노동자와 지역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연구하기 위해 ‘독장미’(Toxic Roses) 프로젝트팀을 꾸렸다. 연구팀은 “우리 모두 꽃을 좋아하지만, 꽃 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더 나은 노동 조건을 누릴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꽃 수출 기업은 노동자의 최저 생계비 보장 및 안전한 작업환경, 담수의 부적절한 사용과 화학물질 처리로 인한 기후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케냐꽃협회 자료에 따르면, 케냐에는 현재 300개가 넘는 꽃 수출 업체가 있고 약 9만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독장미 연구팀을 이끄는 활동가 제니퍼는 “케냐에서 꽃 산업이 시작되었을 때,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빈곤을 줄이고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장밋빛 미래를 전망했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 환경오염과 더불어 심각한 빈곤을 불러왔고 이는 재앙 수준”이라고 말했다.

꽃 산업에서 고통받는 건 여성 노동자다. 일부 여성 노동자는 농장에서 장미를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학물질 때문에 암에 걸리고 여러번 유산을 했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케냐 장미농장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 주디는 독장미 연구팀 인터뷰 영상에서 이러한 사실을 증언했다. 주디는 장미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세번이나 유산했고,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어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회사가 운영하는 클리닉에 갔을 때는 유산 원인에 대해 제대로 들은 바가 없었다. 너무 과로하지 말라는 조언만 들었다.

그는 왜 자신이 세번이나 유산했는지 원인을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회사는 자꾸 문제를 들추면 해고한다고 협박했다.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주디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 큰 병원을 찾고 나서야 농장에서 사용하는 여러 화학물질로 인해 유산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디의 설명에 따르면 매일 출근시간 전, 스프레이 기계로 농장에 화학물질을 분사했는데 안전을 위해 노동자에게 나눠준 작업복은 없었다. 이로 인해 많은 노동자가 심각한 피부병과 면역체계 이상을 앓고 있다.

원산지 제품 가격을 높여 생산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공정무역’(fair trade) 기업에서 일해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언론을 통해 공정무역 산업이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노동자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디는 한 공정무역 기업에서 일하며 월급으로 고작 45유로(약 6만원)를 받기도 했다.

주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구팀을 통해 전해들은 또 다른 케냐 노동자 리디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디아는 12년간 장미농장에서 일했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월급 100유로로 집세를 내고, 음식을 사고, 아이들 학비를 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농장을 운영하는 기업은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도록 일부러 노동계약서를 3~6개월 단위로 작성하고, 10년 넘게 일한 노동자의 임금을 한번도 인상하지 않았다. “올해도 1년 내내 빚을 지며 살았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현실은 나아지질 않아요. 저는 그저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도합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리디아는 절망스럽게 말했다.

이런 비극이 2020년에도 이어지는 것은 케냐의 노동법과 정책이 대부분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독장미 연구팀은 그간 많은 법이 폐지·개정됐지만, 노동법은 여전히 문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꽃 사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노동자에게는 이익이 닿지 않는 배경이다.

밸런타인데이 앞두고 ‘독장미’ 캠페인

장미꽃이 어느 때보다 많이 팔리는 2월14일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독장미 연구팀은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우리가 사는 장미가 어디에서 오는지, 장미를 키우는 노동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독일의 여러 꽃집 앞에서 알릴 예정이다.

이제 길거리에서 장미를 보면 꽃의 아름다움보다 케냐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이 먼저 보인다. 이것이 내가 독일에서 장미를 사지 않는 이유다.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 이슈를 전한다. 격주 연재.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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