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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실험은 계속된다

등록 2020-02-15 13:08수정 2020-02-15 14:29

매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 추모
화가 케테 콜비츠 대표작은
길거리와 엽서·포스터에 실려

독일 사회민주당 청년조직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주장하고
페미 사회주의 여성연합은
터키·쿠르디스탄 민주주의 지원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⑮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남긴 것

2018년 1월14일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 안에 있는 사회주의자 묘역 앞에 추모꽃이 한가득 놓여 있다. 매년 1월 두번째 일요일 베를린에서는 1919년 1월15일 암살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EPA 연합뉴스
2018년 1월14일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 안에 있는 사회주의자 묘역 앞에 추모꽃이 한가득 놓여 있다. 매년 1월 두번째 일요일 베를린에서는 1919년 1월15일 암살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EPA 연합뉴스

매년 1월 두번째 일요일, 베를린에서는 1919년 1월15일 암살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이 집회에서는 독일 좌파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과 수많은 시민들이 동베를린 지역에 로자가 잠들어 있는 사회주의자 묘역까지 길게 행진한다. 묘역에 도착하면 한가운데 솟아 있는 추모비에 적힌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일깨운다’(DIE TOTEN MAHNEN UNS). 이 추모비를 중심으로 로자를 비롯한 그녀의 사회주의자 동지들이 원형으로 안치되어 있다.

로자를 기리는 1월 집회는 유신독재 반대 운동을 하다 1970년대 초 독일로 유학 온 뒤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해온 박소은(70)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박소은 선생님은 “독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후세에 의해 ‘실패했다’고 결론지어지거나 역사 속으로 소멸되지 않았다”며 “사회주의자 묘역은 20세기 초에 인류가 지향하고자 한 이상 사회를 그려볼 수 있는 소중한 장소로 보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일깨운다

그의 말처럼 학문, 예술, 사회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로자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후세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2008년 말에는 뮤지컬 <로자>가 무대에 올랐으며, 2015년에는 로자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린 책 <레드 로자>가 출간됐다. 무엇보다 1990년 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은 다양한 펀드 운영으로 교육·여성·정치 조직과 인종차별주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여러 활동을 지원한다. 이 재단은 내가 일하고 있는 ‘국제여성공간’(IWS)과도 인연이 깊다.

2017년 10월, 국제여성공간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 후원으로 독일에서 첫 난민·이주여성 국제 콘퍼런스를 열었다. 이 콘퍼런스에서는 독일 통일 전 동·서독의 노동자, 통일 독일의 이주자와 난민, 인종차별주의에 영향을 받는 2세대 무슬림 여성 등 22명의 전 세계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6개 언어로 동시통역됐다. 지난해 봄에 같은 재단 지원으로 국제 콘퍼런스의 결과물을 담은 책 <내가 독일에 왔을 때>(Als ich nach Deutschland kam)가 출간됐다.

베를린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주의자는 민중의 삶과 생활을 예술작품으로 만든 화가이자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다. 지난 2월9일, 베를린 서쪽 동네 샤를로텐부르크에 위치한 ‘케테 콜비츠 박물관’에서는 그의 새로운 그림이 공개되는 특별전시 개막 행사가 열렸다. 낙태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형법 218조’에 대한 반대, 베를린의 열악한 거주 환경과 아이들의 놀이터가 없는 도시계획에 대한 비판 등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 20여편이 박물관 한편에 새로 걸렸다. 1986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을 오랫동안 지켜온 후원자와 친구들이 한데 모여 그의 작품과 함께 긴 겨울밤을 보냈다.

지난 2월9일 케테 콜비츠의 대표적인 작품 &lt;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gt;가 케테 콜비츠 박물관 입구에 걸려 있다. 채혜원 제공
지난 2월9일 케테 콜비츠의 대표적인 작품 <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가 케테 콜비츠 박물관 입구에 걸려 있다. 채혜원 제공

유럽 예술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의 최초 여성 회원이기도 했던 케테 콜비츠는 늘 사회주의와 혁명의 편에서 민중들을 그려왔다. 베를린은 그가 52년간 살면서 일한 곳인 만큼, 길거리나 여러 기관의 엽서나 포스터에서 그의 대표작 <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Nie Wieder Krieg)를 만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열여덟살 아들을 잃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손자마저 떠나보낸 케테 콜비츠는 전쟁의 참상은 물론 가난과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 등을 그리며 투쟁했다.

오늘 사회주의에 관심 갖는 이유

로자 룩셈부르크나 케테 콜비츠 외에도 여러 사회주의자를 만날 수 있는 베를린에서 ‘사회주의’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미국에서 젊은 밀레니얼 세대가 이끄는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모임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사회주의를 향한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활발하다. 뉴미디어 뉴스 매체 <액시오스>(AXIOS)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제 불평등이 계속 증가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주의자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답한 비율은 70%에 이른다. 대학 진학만이 유일한 선택이라 강요받으며 자랐지만, 졸업 이후 무급이나 저임금 인턴 자리를 맴돌며 실업 상태에 놓인 청년들은 특히 정치 영역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청년조직 ‘유조스’(Jusos)는 자신들을 ‘젊은 사회주의자’로 소개한다. 유조스에는 14살에서 35살 사이 7만명 이상의 청년들이 독일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기본 가치는 자유, 정의, 연대다. 유조스는 차별과 억압 없는 사회를 꿈꾸며 난민 고립정책 반대, 동일노동 동일임금, 더 나은 직업교육 시행 등 여러 정책 활동을 펼치고 있다.

페미니즘 영역에는 이주 여성들이 이끄는 조직인 ‘사회주의 여성연합’(Sozialistischer Frauenbund, SFB)이 있다. 2010년 터키와 쿠르디스탄에서 정치적으로 추방되거나 이주한 여성들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현재 독일, 영국, 프랑스 등 8개 유럽 국가에서 활동한다. 터키와 쿠르디스탄은 물론 모든 이주 여성과 일하는 여성을 지원하는 것이 조직의 목표다. 내가 이들을 처음 만난 건 2017년 겨울, 30여개 조직과 여러 개인으로 구성된 ‘베를린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을 통해서다. 우리는 매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과 11월25일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 집회를 조직하는 일 외에도 다양한 정치 캠페인을 함께 펼치고 있는데, 늘 사회주의 여성연합 회원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지난해 5월 ‘사회주의 여성연합’ 주도로 열린 터키 여성 정치인의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독일 베를린 집회 모습. 채혜원 제공
지난해 5월 ‘사회주의 여성연합’ 주도로 열린 터키 여성 정치인의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독일 베를린 집회 모습. 채혜원 제공

이들을 통해 베를린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시리아 쿠르드족 마을에서 터키 정부나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와 공습에 대해 듣고 국제연대 활동을 조직한다. 지난해 5월에는 터키 정부군이 시리아 쿠르드족 마을을 공습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가 감옥에 갇혀 단식투쟁을 벌인 인민민주당 소속 터키 여성 정치인들에게 연대의 뜻을 보내는 집회를 열었다.

사회주의 여성연합 베를린지부에서 활동 중인 메랄은 “우리는 독일 내 다른 이주 여성 단체와 함께 터키와 쿠르디스탄의 민주주의 투쟁을 지원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메랄은 베를린에 사는 터키와 쿠르디스탄 출신의 이주 여성들과 만나기 위해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또한 사회주의 여성연합 회원들은 더 많은 여성이 고립되지 않고 착취, 성차별,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여러 정보를 담은 잡지를 터키어로 발행 중이다.

당신들은 살아 있는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지들이 잠들어 있는 사회주의자 묘역에 갔을 때, 묘역을 품고 있는 공동묘지 공원을 걷던 중 우연히 한 건물에 적혀 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당신들은 살아 있는 겁니다’(UND SIE LEBEN DOCH). 베를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남기고 간 영적 유산을 발견하는 동안, 앞으로 남은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듯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억압에 맞선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그들이 베를린에서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실험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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