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영화 <올 더 데드 원스>(All the Dead Ones) 상영 행사에 참석한 배우 클라리사 키스테와 카롤리나 비안키가 환히 웃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제공
니나 크론예거는 독일 영화 및 텔레비전에서 인기 있는 배우 중 한 명이다. 헤센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1990년대부터 연극과 영화배우로 일해왔지만, 그 시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배역을 맡은 작품에서 극장 감독(연출자)은 그녀에게 신체접촉을 시도했고, 그는 거절했다. 그때부터 감독은 니나에게 부당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리허설 때마다 그녀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며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소리쳤고, 시사회에서 다른 배우들과 함께 앉아 있지 못하도록 했다.
니나는 감독의 신체접촉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다른 차원의 폭력이 행사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문제제기 할 수 없었다. 연극과 영화계에서 여성의 저항은 곧 업계 퇴출을 의미했다. 저항하면 다시는 업계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이 사건 이후로 니나는 배우로 일하면서 여러 번 성폭행을 목격했다고 털어놓았다.
독일 미투운동의 성과는 ‘상담센터’
변화는 ‘미투(#MeToo) 운동’에서부터 일어났다. 2017년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은 독일에도 영향을 끼쳤다. 독일 영화계에서는 여배우 등에게 성폭력을 가한 가해자로 지목된 것은 남성 거장 감독 디터 베델(78)뿐이고 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업계 여성 비율 확대 등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난달 독일 헤센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니나 크론예거는 미투운동 이후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테미스 상담센터’ 설립을 꼽았다. 17개의 영화 및 미디어 조직이 만든 이 센터는 업계에서 발생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법적·심리적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2018년 10월 센터 설립 이후 캐스팅 과정부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이들이 지원을 받고 있다. 니나는 “상담 요청 사실이 알려질 경우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대부분 피해자가 익명으로 상담한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연극, 영화, 텔레비전, 미디어 업계에서 더 많은 여성이 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 동참하고 있다. 업계의 성차별적인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독일에서 이 움직임을 이끄는 조직은 ‘프로 크보테 필름’(Pro Quote Film)이다. 영화계 여성 인사들은 이 조직을 통해 제작과 카메라, 연출, 사운드, 대본 등 모든 영화 및 미디어 분야에 50% 여성 할당을 요구해왔다. 최근에는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여성 제작진 비율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프로 크보테 필름’ 자료에 따르면, 영화산업 내 사운드 분야의 여성 비율은 9%에 그쳤으며, 카메라 팀의 여성 비율도 15%뿐이다. 여성 감독 비율 역시 26%로 낮게 나타났다.
2년간 이어온 이들의 활동은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독일에서 다양한 티브이 시리즈와 영화를 제작하는 스튜디오 함부르크 프로덕션 그룹 내 여성 감독 할당제 50% 도입을 이끌었고, 독일의 제1공영방송 아에르데(ARD)로부터 제작영화 여성 감독 비율 40% 할당을 약속받았다. 올해 상반기 내로 영화, 티브이 및 미디어 업계 젠더 모니터링 결과를 담은 연구보고서도 발표될 예정이다. ‘프로 크보테 필름’은 제작진 여성 할당제 시행 외에도 공영방송사와 자금지원기관, 관련 교육기관에 대해 ‘각 기관 임원 50% 여성 할당’ ‘기관별 젠더 모니터링 실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막한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인 마리에테 리센베크 총감독과 카를로 샤트리안 아트디렉터가 개막식을 앞두고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제공
미투운동 이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베를린국제영화제다. 현재 베를린은 3월1일까지 열리는 영화제 열기로 뜨겁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베를린영화제에 분 변화의 바람은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첫번째 기자회견부터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남성 1인이 집행위원장을 맡아왔던 것과 달리 올해 처음으로 집행위원장 직책을 남녀 공동(마리에테 리센베크 총감독과 카를로 샤트리안 아트디렉터)으로 꾸렸다. 이 기자회견에서 리센베크 총감독은 “경쟁부문에 오른 18개 작품 중 6명의 여성이 감독 등 주요 제작진으로 참여했다”며 “칸영화제에 비해서는 높은 비율이지만 여전히 영화계에서 남녀 동등한 비율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베를린영화제를 위한 완벽한 개막작’이라 평을 받은 영화 <마이 샐린저 이어>(My Salinger Year)는 카메라, 편집, 의상, 제작 및 세트 디자인을 모두 여성이 맡았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작가를 꿈꾸는 한 여성이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국 여배우 헬렌 미렌이 올해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베를린영화제 쪽은 “헬렌 미렌의 평생 공로를 인정해 명예황금곰상을 수여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영화제에서는 헬렌 미렌을 위한 ‘오마주’라는 특별 섹션을 열고 그의 대표작 <더 퀸>(2006)을 비롯해 그가 1989년부터 2019년까지 출연한 영화 다섯 편을 상영한다.
2010년부터 베를린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는 재독 교포 1.5세 신효진씨는 미투운동 이후 남성 지배적이던 영화제의 변화를 체감한다고 전했다. 지난해에는 여성 감독 작품을 주제로 여성 제작진과 여성 사회자가 대담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동료들이 패널을 모두 여성으로 구성한 게 신선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올해는 파노라마, 경쟁 부문 등 영화 섹션별 책임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며 “분야별 여성 심사위원 등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여성 비율이 높아지는 걸 보면서 영화제가 크게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영화계 여성 인사들로 구성된 ‘프로 크보테 필름’이 독일 베를린 중심부인 파리저광장에 있는 베를린예술아카데미에서 여성 할당제와 관련한 행사를 열고 있다. 채혜원씨 제공
문화계는 변화를 원하다
지난 며칠간 베를린영화제 현장을 둘러보면서 다양한 성평등 관련 행사를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지난해의 경우 여성 감독 작품 회고전과 같이 성평등 관련 행사가 한두 가지에 그쳤다면, 올해는 더 풍성하게 마련됐다. 개막식 이후 영화제에서는 여성과 영성, 식민지 등을 주제로 한 브라질 여성 감독의 비디오 아카이브 전시, 노르웨이 필름연구소가 주최한 다양성 추구 토론회, 독일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후원으로 열린 영화산업의 남녀평등과 다양성에 대한 전문가 회의 등 여러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영화 및 티브이, 미디어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이 활발히 네트워크를 맺기 시작한 것이 특징이다. 지난 21일 ‘국제 영화 및 티브이 여성 네트워크’, ‘남아프리카 영화 및 티브이 자매연대’, ‘스위스 여성 시청각 네트워크’ 등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련 업계 관계자들이 국제 원탁회의를 열어 산업 내 여성 비율을 높일 방안을 논의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유럽 영화계 여성 네트워크’(EWA Network)의 알레시아 소날리오니 이사는 “2011년 처음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온통 남성뿐인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영화제에 참여하는 여성 비율 증가가 성평등을 의미하는 지표는 아니지만, 남성들의 축제나 다름없었던 베를린영화제가 변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카메라 앞과 뒤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꾀하고 있는 더 큰 구조 변화는 이제 베를린을 넘어 프랑스 칸,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다른 국제영화제로 이어질 것이다. 영화제에서 만난 수많은 업계 여성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였다. “문화계는 변화를 원한다!”(Kultur will Wandel!)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 이슈를 전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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