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선도한 스페인 왕실, 부정부패 ‘침몰’ 위기

카를로스 전 국왕, 1억달러 뇌물
혼외 관계 연인 통해 전달·세탁
돈 관리 재단의 수혜자는 현 국왕
공주 부부도 탈세·사기 사건 연루
민주화 선도 평가받다 여론 싸늘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왼쪽)과 혼외 관계인 코리나 라르센. AP 연합뉴스

스페인 왕실이 잇단 부정부패 스캔들로 존폐의 위기로 몰리고 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지난 8일 한 기자회견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82) 전 국왕을 둘러싼 스캔들에 대해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불안케 하는 우려스러운 혐의들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후, 스페인 언론이 연일 왕실 비판 기사로 도배되고 있다.

최근 방송국 <라섹스타>와 일간지 <엘에스파뇰>이 스페인의 각 기관에 대한 여론 평판 조사를 실시한 결과, 왕실과 펠리페 6세 현 국왕이 각각 10점 만점에 4.3점, 4.8점으로 최하위 평점을 받았다.

스페인 왕실은 민주화를 선도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왔다. 카를로스 전 국왕은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35년 집권이 끝난 뒤 재위에 올랐다. ‘완전한 공화국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당시 여론을 의식한 것이긴 하나, 권력을 내각에 완전히 이양하는 등 입헌군주제를 정착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문란한 사생활 문제로 인해 아들 펠리페 현 국왕에게 재위를 넘긴 데 이어, 그 이후에도 각종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려왔다. 최근에는 1억달러 뇌물이라는 초대형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됐다. 카를로스 전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 전 국왕에게서 스위스 은행을 통해 뇌물 1억달러를 받은 사실이 지난해 스위스 언론의 폭로로 드러났다. 산체스 총리가 언급한 것도 이 사건이다.

지난해 수사에 착수한 스위스 검찰에 따르면, 이 뇌물은 2008년 고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보낸 것이다. 메디나와 메카를 연결하는 67억유로(76억5700만달러) 규모의 초고속열차 건설 수주와 관련된 것으로, 스페인 건설회사 컨소시엄이 사업을 따낸 바 있다.

특히 이 돈은 카를로스 전 국왕과 혼외 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인 사업가 코리나 라르센 등을 통해 전달되고 돈세탁된 것으로 확인됐다. 스페인 언론은 지난해 라르센과 사설 탐정의 통화 내용을 폭로했다. 이 통화에서 라르센은 “카를로스 국왕이 돈세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며 “왕은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를 모른다”고 불평했다. 스페인 대법원은 지난 6월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결정했다.

이 부패 스캔들은 펠리페 현 국왕으로까지 번졌다. 그 돈을 관리하는 파나마 재단의 수혜자가 펠리페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국왕은 지난 3월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포기한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전직 국왕에게 주는 국가의 연금 20만달러도 취소했다.

민주화를 선도한 입헌군주의 모범으로 평가됐던 스페인 왕실의 추락은 사실 2012년부터 시작됐다. 이전부터 혼외관계 소문이 무성했던 카를로스 전 국왕은 2012년 4월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코끼리 사냥을 하다가 엉덩이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냥 여행에 연인인 라르센도 동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금융위기로 실업률이 24%로 치솟고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했던 스페인에서 분노한 여론이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 카를로스의 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도 탈세와 사기 사건에 연루됐고, 공주 직위를 박탈당했다.

카를로스는 2014년 왕위에서 물러났고, 아들인 펠리페 현 국왕이 즉위했다. 그 뒤에도 카를로스와 연관된 각종 스캔들이 줄을 이었다. 카를로스는 2010년에도 바레인 국왕에게 받은 190만달러를 직접 들고 스위스로 가서 자산관리인에게 건넨 것이 최근 드러나기도 했다.

스페인 국왕은 재위 기간 중의 일에 대해 면책권을 갖는다. 현재까지 드러난 카를로스의 혐의는 모두 재위 기간 중 일어났다. 그가 처벌을 받기는 쉽지 않지만, 왕실의 존치에 대한 심각한 회의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스페인 언론은 전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