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전 ‘망령 혹은 돌아옴에 대하여’에 전시된 작품. 아크릴 상자 안에 한국전쟁 등과 관련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주연 통신원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둡고 붉은 조명에 놀라게 된다. 핏빛 같은 붉은 조명 아래 투명 아크릴 상자가 놓여 있고, 상자 안에는 전쟁이나 냉전과 관련된 물건들이 들어 있다.
지난 3일(현지시각) 맞은 독일 통일 30돌을 기념해 지난달 19일부터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설치미술 전시회 ‘망령 혹은 돌아옴에 대하여’(Of SPECTERS OR RETURNS)다. 한국계 입양인으로 덴마크에서 미술작가로 활동하는 제인 진 카이센(40)이 독일 통일 30돌을 맞아 분단 역사를 공유하는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로 전시회를 열었다. 11월2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정가희 큐레이터는 “(조명인) 붉은빛은 전쟁의 핏빛을 연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말했다.
카이센이 2015년 5월 국제민주여성연맹의 국제사절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한 일이 전시의 계기가 됐다. 방북 경험을 글로 쓰겠다는 약속을 국제민주여성연맹에 하고 사절단에 포함됐단다. 카이센은 덴마크로 돌아와 자료를 찾다가 한국전쟁 때인 1951년 북한을 방문했던 덴마크 기자 케이트 플레론(1909~2006)의 저서 <북한에서, 세계 종말의 인상>(1952)을 발견했다.
카이센은 이날 “상자 표면에 플레론의 책에서 본 구절과 내가 2015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생각을 인쇄해, 그와 나의 대화처럼 구성했다”고 말했다. 정 큐레이터는 “두 페미니스트가 시대를 초월해 책을 통해 만나 대화를 나누는 방식의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플레론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저항운동을 하다가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다.
아크릴 상자 7개엔 플레론의 저서, 1980년대 피 묻은 한국 헌병대의 헬멧, 미국 화학무기 세트, 한국전쟁 때 쓰인 총탄 상자, 2차 대전 때 일본군이 쓰던 거울, 누군가 입던 남자 한복, 한국전쟁 중 미국 쪽 심리전 전단 등이 진열되어 있다. 카이센이 지난 10년간 수집한 물건이다. 카이센이 북한에 다녀온 소회를 적은 글과 플레론의 책에 나온 글도 볼 수 있다. 벽 한 면은 10㎝ 안팎의 흑백사진들을 가로로 연결해 놓았는데,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여성, 아이들의 모습뿐 아니라 요즘 북한 일상도 담겨 있다. 플레론이 1951년에 찍은 사진과 카이센이 2015년에 찍은 북한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 사진들이다.
설치미술전 ‘망령 혹은 돌아옴에 대하여’ 전시장 모습. 한주연 통신원
관람객 알렉산더 우텐도르퍼(22)는 “미국과 중국 때문에 어렵긴 하겠지만 남북 간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한 간의 더 많은 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사업가 김채리(22)씨는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젊은이들도 이런 데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봉기 주독일한국문화원장은 “분단, 전쟁이라는 주제는 분단을 겪은 독일인들에게도 와닿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놓인 우선과제인 남북 간 평화 정착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베를린/
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