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회피처를 활용한 전세계 정치·경제 지도층과 유명인의 은닉 재산이 공개됐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이하 협회)는 3일(현지시각) 35명의 전·현직 국가 정상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금융거래내역 등을 분석해 ‘판도라 페이퍼스’라는 이름을 붙여 공개했다. 여기에는 장관·판사·장군 등 고위 관리 330여명, 미국 <포브스>에 등록된 억만장자 130여명 등이 포함돼있다. 스위스, 싱가포르, 키프로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의 조세회피처에서 영업하는 14개 금융서비스 업체들과 관련된 거래내역, 이메일 등 1190만건의 파일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의 <뉴스타파>를 비롯해 <워싱턴 포스트>, <비비시>(BBC) 등 전세계 117개국 150개 언론이 분석에 참여해, 이날부터 며칠에 걸쳐 세부 내용을 공개한다.
이들 매체의 보도를 보면,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는 역외 유령회사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말리부와 워싱턴, 영국 런던 등지에서 호화주택을 구매하는 등 1억달러어치 이상의 비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압둘라 2세는 자산 매입에 부적절한 행위는 없다고 협회에 밝혔다. 요르단은 ‘판도라 페이퍼스’가 공개되기 몇 시간 전 협회의 인터넷 사이트 접속을 차단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는 2009년 프랑스 리비에라에 있는 대저택을 구매하려고 유령회사에 2200만달러를 보냈으나, 재산 신고에서는 이를 숨겼다. 오는 8~9일 총선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는 바비시 총리는 이날 텔레비전 토론에서 이 보도에 대해 “내 돈으로 세금을 냈다”며 문제될 게 없다고 반박했다.
케냐의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은 “모든 공직자의 재산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해왔으나, 최소 7개의 해외 유령회사를 설립해 3000만달러 이상의 국외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2017년 880만달러짜리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을 새로 보유하게됐다. 이 건물을 보유한 버진아일랜드 업체를 인수함으로써 31만2000파운드(약 5억원)의 재산세를 절약했다. <가디언>은 이는 불법이 아니고 블레어 부부가 적극적으로 탈세를 추구했다는 증거는 없다면서도 “부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게 해주는 구멍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인으로 알려진 스베틀라나 크리보노기크가 28살이던 2003년 3월 모나코 해안가의 고급주택을 매입한 사실도 드러났다. 매입 시점은 크리보노기크가 딸을 낳은 직후였는데, 러시아의 한 독립 언론은 푸틴 대통령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보도한 바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기예르모 라소 에콰도르 대통령 등도 조세회피처에서 재산을 거래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조세회피처로 부상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사우스다코타주와 네바다주 등이 금융기밀법을 도입해, 부패와 인권 유린으로 이름난 외국 지도자들의 돈 수천만달러를 이들 주의 신탁회사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대목을 “미국에게 가장 괴로운 폭로”라고 짚었다.
이 밖에 억만장자 중에는 터키의 건설업계 거물 에르만 일리카크, 소프트웨어 회사 레이놀즈 앤드 레이놀즈의 전 최고경영자(CEO) 로버트 브로크만 등이, 연예인 중에는 팝스타 샤키라, 모델 클라우디아 시퍼가 역외 회사를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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