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시민들이 내년 5월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함께 출마하기로 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과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 다바오 시장의 동맹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내년 5월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최종 후보 등록 마감을 앞두고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전직 독재자의 아들과 현직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고, 현직 대통령이 다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부녀간 대결 가능성도 예상되고 있다. 프로 복서로 8체급 챔피언을 지낸 매니 파키아오도 진작 대선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필리핀은 내년 5월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등을 함께 치르는데, 15일 후보 등록을 마감한다.
가장 의외의 소식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의 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이다. 사라 시장의 대변인은 13일 사라가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에 내년 부통령 선거 후보로 등록했다고 발표했다.
다바오시 재선 시장인 사라는 애초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지난달 다바오 시장 후보로 등록했으나, 한달 만인 지난 9일 시장 후보 출마를 철회했다. 필리핀 선거 제도상 후보 마감 전까지 직급을 바꿔 출마할 수 있어, 그가 곧 대선 후보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사라와 손을 잡은 대선 후보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다. 마르코스 전 의원은 필리핀의 독재자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로, 지난달 대선 후보로 등록했다. <로이터> 통신은 두 사람이 각각 옛 독재자 가문과 현직 대통령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번 대선의 유력 주자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필리핀 대선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따로 선출되며, 서로 다른 정당에서 출마하더라도 동맹을 맺을 수 있다. 다만 사라는 아직 마르코스와의 동맹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날 두테르테 대통령 쪽도 예상 밖 소식을 전했다. 대통령 공보 비서관인 마르틴 안다나르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15일 부통령 선거 후보로 등록해 딸인 사라 시장과 대결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를 확인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달 초 정계은퇴 의사를 밝혔으나 이를 번복한 것이다. 필리핀 헌법상 대통령직은 연임할 수 없다. 두테르테는 최측근인 봉 고 상원의원과 짝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봉 고 상원의원은 지난달 부통령 후보로 등록했으나, 이날 대선 후보로 바꿔서 등록했다.
양쪽이 밝힌 대로 진행되면, 내년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과 그의 딸이 각각 부통령 후보로 대결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애초 필리핀 정가에서 예상했던, 사라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아버지가 부통령 후보가 되는 그림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필리핀 정가에서는 후보 등록 마감 직전까지 후보 간 이합집산과 새로운 출마 선언 등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필리핀 시민단체들은 독재자의 아들과 현직 대통령의 딸이 손을 잡았다는 점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좌파 시민사회단체 ‘바얀’의 레나토 레이어스는 “마르코스-두테르테 동맹은 독재자 마르코스의 복원과 퇴임 대통령 두테르테 보호라는 가장 이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1965년 당선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심각한 인권유린을 자행하다 1986년 민주화 시위로 축출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초법적인 마약 단속으로 6천여명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숨지게 했고, 이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가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가운데)와 그의 딸 사라 두테르테(오른쪽). 로이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