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필리핀 대선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하기로 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과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의 지지자들이 만든 홍보물. 페이스북 갈무리
필리핀 대선에서 독재자의 아들과 현직 대통령 딸의 협력이 결국 현실화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43) 다바오 시장은 16일 밤(현지시각) 본인 페이스북에 1분49초짜리 동영상을 올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64) 전 상원의원과 러닝메이트가 돼 내년 대선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연대와 답합을 통해 더 강한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도 썼다.
마르코스 전 의원도 이날 성명을 내고 “우리는 내년 5월 치를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통합된 리더십을 추구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마르코스 전 의원은 1970~80년대 필리핀을 독재 통치하다 1987년 민주화 시위로 쫓겨난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로, 지난달 필리핀 대통령 선거 후보로 등록했다. 현직 대통령의 딸인 사라 시장은 애초 다바오 시장에 세 번째 출마하겠다고 했다가 최근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는 대선 후보 등록 초반 여론 조사에서 1위를 달리기도 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었다.
필리핀 대선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각각 따로 선출되며, 서로 다른 정당에서 출마하더라도 동맹을 맺을 수 있다. 마르코스 전 의원과 사라 시장의 소속 정당도 각각 신사회운동(KBL)과 라카스-CMD당으로 서로 다르다. 필리핀은 내년 5월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등을 치른다.
이번 협력은 마르코스 전 의원과 사라 시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수천 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의 정치는 엘리트 가문 간 연합과 지역 구도가 매우 중요한데, 남부 지역에 지지 기반을 가진 두테르테 가문과 북부에 기반을 둔 마르코스 가문이 힘을 합쳤다는 의미가 있다. 김동엽 부산외국어대 교수(아세안연구원장)는 “2016년 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했던 마르코스 전 의원은 강력한 지원군을 얻어 내년 대선의 승리 가능성을 높이게 됐다”며 “또 아직 젊고 정치 경력이 짧은 사라 시장으로서는 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중앙 정치 경험을 쌓아 차기 혹은 차차기를 노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사라 시장의 경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는 예측이 적지 않았지만 지역적인 한계와 정치 경력이 짧다는 점 등이 한계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엽 교수는 “사라 시장은 아직 대선 후보가 확정되기 전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한 것이고, 확정된 뒤에는 마르코스 전 의원이 1위를 달렸다”며 “지역적으로도 두테르테 가문의 지지 기반인 민다나오에서는 복싱 영웅 파키아오와 두테르테 대통령의 충복인 봉고 상원의원 등 다른 후보들이 출마해 표가 나뉘게 돼 있다”고 말했다.
두 가문의 협력은 일찍 시작됐다. 마르코스 가문은 2016년 대선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을 지지했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재임 동안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유해를 마닐라 국립묘지에 안장하도록 허용했다.
옛 독재자의 아들과 강력하게 통치한 현직 대통령의 딸이 협력하면서 인권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가 공고화될 것이라는 우려다. 필리핀 인권단체 카라파탄은 두 가문의 동맹과 관련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단히 심각한 위협”이라는 우려를 표시했다. 일부 시민들은 두 사람의 동맹에 반대하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서고 있다. 인권 및 정치범 지원 활동가들은 이달 초 선거관리위원회에 마르코스 전 의원의 대선 출마를 막아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