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테니스 선수 펑솨이(왼쪽)와 중국 공산당 전 정치국 상무위원 장가오리(오른쪽). AFP 연합뉴스
중국의 여자 테니스 선수 펑솨이(35)의 ‘미투 폭로’가 불러온 파장이 본인의 번복과 안전 확인에도 불구하고 확산하고 있다. 그의 폭로 대상이 지금까지 문제 됐던 인사들과는 급이 다른 정치인이고, 중국 당국이 추진하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두 달여 앞둔 시점에 폭로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최고 정치인 ‘가해자’-국제 테니스 스타 ‘피해자’
지난 2일 펑솨이에 의해 성폭행 가해자로 폭로된 장가오리(75)는 2012~2017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인사로, 중국 정치 서열 7위 안에 들었던 최고위급 정치인이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14억 중국을 지배하는 공산당 최고 그룹으로, 시진핑 국가 주석을 포함해 총 7명으로 구성된다.
장가오리는 최근 몇 년 새 중국에서 발생한 성폭행 폭로 대상 중 직위가 가장 높다. 2014년 부패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이 선고된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 성상납 의혹을 받았으나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제기된 것이었다. 2018년 저우샤오쉬안(필명 셴쯔·28)에 의해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의 유명 진행자 주쥔도 공산당 정치자문기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유력 인사지만, 장가오리와 비교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장가오리가 시진핑 주석의 전반부 5주년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 특히 현 지도부 입장에서는 이번 폭로가 매우 불편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당시 시 주석은 부정부패 척결을 핵심 의제로 삼아 대대적인 사정 칼날을 휘둘렀고 중앙과 지방의 수많은 공산당 간부와 국영기업 간부들이 뇌물과 성 추문 의혹 등으로 낙마하거나 감옥에 갔다.
폭로 당사자인 펑솨이 역시 중국 스포츠계의 유명 인사다. 그는 동양인이 두각을 나타내기 힘든 테니스 분야에서 2014년 여자 복식 세계 랭킹 1위를 찍었고, 2013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 여자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여자단식 우승을 비롯해 2개의 단식 타이틀과 22개의 복식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장가오리가 중국 내 유력 인사라면, 펑솨이는 중국은 물론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글로벌 스타다. 그의 주장과 안전에 세계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이례적인 폭로 ‘번복’, 안전하다 해명하지만…
미투 폭로 뒤 소식이 끊겼던 펑솨이는 2주 만에 다시 등장해 폭로 내용을 부인하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최고위급 정치인의 성폭행 범죄를 폭로한 여성이 이런 사실을 거짓이라고 인정하고도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펑솨이는 지난 2일 본인 소셜미디어에 장가오리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당시 “절대 동의하지 않는 관계가 이뤄졌다”며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더라도, 자멸을 재촉하는 길일지라도 진실을 알리겠다”고 썼다. 1600자가량의 글에는 성폭행 사실 외에도 둘의 첫 만남부터 철학과 역사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바둑과 노래 부르기 등을 함께 했다는 내용 등 당사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글은 20여분 만에 삭제됐지만 캡처본이 돌면서 하루 뒤 미국 언론을 시작해 전 세계로 퍼졌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관련 뉴스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펑솨이의 소셜미디어 계정이 사라졌고, 인터넷 검색창에서 장가오리와 펑솨이라는 단어의 검색이 금지됐다. 곧 펑솨이가 중국 당국에 의해 감금됐다는 추측이 널리 퍼졌다. 2주 만에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17일 펑솨이가 국제테니스협회(WTA) 회장에게 보낸 이메일 문건이 중국 관영매체를 통해 보도된 것이다. 그는 이메일을 통해 “성폭행에 대한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무사하고, 사생활 보호를 위해 보도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했다. 이후 중국 관영 매체 기자들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펑솨이의 일상 사진 등이 보도됐다.
IOC 위원장과 통화…올림픽 보이콧 움직임 의식?
이런 이례적 전개에는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불과 70여일 남았다는 점이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는 이번 올림픽을 2년여의 코로나19 대응에서 승리한 중국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기회로 여기고 사활을 걸고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국제 사회의 동조 움직임이 일었다. 영국 외교부는 지난 20일 성명을 통해 중국 정부에 펑솨이의 소재와 안전을 입증하라고 촉구했고,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딕 파운드 위원도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되면 내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경고하고 나섰다.
이번 폭로가 ‘올림픽 보이콧’이라는 움직임에 기름을 붓는 흐름이 이어지자 본인이 직접 등장했다. 21일 펑솨이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인 토마스 바흐와 인터넷 화상 통화를 했다. 둘은 이 통화에서 내년 올림픽 때 만나 함께 식사를 하자는 약속까지 했다. 펑솨이가 국제올림픽 위원회를 상대로 본인 안전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 중국 정부의 요청이나 강요, 혹은 위협 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많은 운동선수들이 그의 안전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고, 세계 언론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겨울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고, 중국 정부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21일 중국 출신 세계적 테니스 선수 펑솨이와 화상 통화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