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주도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평화유지군이 지난 14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제공항에서 철수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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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월25일 영국 왕립지리학회는 핼퍼드 매킨더 당시 런던정경대 학장의 ‘역사의 지리적 중심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매킨더는 당시 패권국가인 영국의 관점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확보하려는 지정전략과 지정학의 뼈대를 제시했고, 그 이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킨더는 영국을 서방 해양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도전하는 유라시아 대륙세력의 흥기를 경고했다. 그의 논지는 자신이 ‘중심축’ 지역이라고 규정한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 지역을 장악하는 유라시아 대륙 패권국가 형성을 저지하는 것이 서방 해양세력의 패권을 유지하는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매킨더는 ‘중심축’을 나중에 ‘심장지대’라는 용어로 바꾸었고, 그 영역은 대략 우크라이나에서부터 카자흐스탄까지, 지금은 독립한 옛 소련의 공화국들이다.
우크라이나~카자흐 지역 둘러싼
서방 해양 vs 대륙세력 오랜 긴장
매킨더는 당시 러시아가 이 심장지대를 차지하면, 영국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인도 등 유라시아 대륙 연안의 식민지를 공략할 수 있는 지정전략적 우위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이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동지중해, 중동, 인도 등으로 남하를 시도해, 영국과 수없이 충돌했다. 1853~1856년에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대 국제전인 크림전쟁이 벌어졌다.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까지 진공할 것을 우려해, 그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을 선점하려고 3차례나 침공했다. 영국의 아프간 침공은 20세기 들어서 소련의 아프간 점령, 21세기 들어서 미국의 아프간 전쟁의 선례였다.
매킨더는 유라시아를 ‘세계의 섬’으로 개념 지었다. 이 세계의 섬은 심장지대, 이 심장지대를 둘러싸는 유럽, 중동, 인도, 동남아, 중국 연안 지역을 ‘주변 혹은 내부 초승달’ 지역, 이 주변 초승달 지역과 바다로 격리된 영국과 일본, 미국을 ‘외부 혹은 섬 초승달’ 지역으로 규정했다. 매킨더는 외부 초승달 지역에 있는 영국이나 미국 등 서방 해양세력들은 인구와 부, 자원이 몰린 주변 초승달 지역을 굳건히 장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심장지대를 장악하는 유라시아 대륙세력의 출현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킨더의 이런 지정학적 틀은 그 뒤 니컬러스 스파이크먼, 조지 케넌,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미국의 지정전략가들에게 이어져, 미국 패권전략을 확립하게 된다. 그 원칙은 첫째,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국가 출현을 저지하라’, 둘째, ‘유라시아 대륙의 연안 지대를 확고하게 장악하라’, 셋째, ‘유라시아 대륙 연안 지대의 장악을 통해서 유라시아 대륙세력을 봉쇄하라’이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의 주변 초승달 지대에 해당하는 환형지대 개념을 만들어, 소련이나 중국의 포위를 주장했다. 케넌은 2차대전 뒤 소련의 부상에 맞서는 냉전 시대의 ‘봉쇄’ 개념을 주창했다. 브레진스키 역시 소련의 아프간 점령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소련 붕괴의 단초를 놓았고, 소련 붕괴 뒤에는 소련 세력권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륙세력의 부활에 못을 박으려 했다.
소련 붕괴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가 소련 영향권으로 확장했고, 최근에는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개는 매킨더의 지정학에 기반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국가 출현을 예방하거나 저지하는 미국의 전략이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국가 출현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중대한 기로에 봉착했다.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부상했고, 러시아는 다시 자신의 세력권을 복원하려 하고 있다. 이 두 사태는 서로 맞물린 현상이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 저지를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에 주전선을 설정해 국력을 집중하자,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서 전선을 치고는 세력권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미국에 두개의 전선을 강요하고 있다.
2022년 들어서 러시아의 세력권 복원 시도는 임계점에 오르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구축하고는, 침공의 우려를 자아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지난 10일부터 러시아와 일련의 회담을 통한 협상과 타협에 나서게 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대화 시작에 앞서 카자흐스탄에서는 지난 2일부터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 대통령은 러시아가 주도하는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의 집단안보기구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 평화유지 병력 파견을 요청했고, 사실상 러시아의 공수병력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이 파견됐다.
13일로 이 두 이벤트는 일단락됐다. 10일부터 시작된 미국-러시아의 고위급 실무회담, 12일의 나토-러시아위원회 회담, 13일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러시아 회담이 끝났다. 카자흐에서는 반정부 시위 사태가 진정됐고, 13일부터 러시아 주도의 평화유지군 철수가 시작됐다.
우크라이나 위기와 카자흐 시위 사태는 ‘심장지대’에서 세력권을 복원하거나 굳히려는 러시아의 시도이자 기회이고, 위기이기도 하다. 첫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위기를 통해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의 세력권과 관련한 협상을 얻어냈다. 둘째, 러시아는 때마침 일어난 카자흐 시위 사태에 해당 정부의 요청에 따른 신속한 군사개입을 해서, 세력권 유지와 확대를 보여줬다.
임계점 오른 러 세력권 복원 시도
올해 대륙세력 부활 가늠해볼 수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0일 집단안보조약기구 회원국 정상들과의 화상회의에서 “누구도 우리 집안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이른바 색깔 혁명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것도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색깔 혁명이란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 등의 나라들에서 친러시아 정권을 무너뜨린 일련의 대규모 시위 사태이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해야 하는 미국을 압박해 협상에 나서게 했으나, 원하는 세력권 복원을 달성할지는 불투명하다. 미국이 러시아에 소련의 심장지대 장악과 같은 수준으로 세력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이번 우크라이나 위기와 카자흐에 대한 병력 파견은 해당국에서 반러 감정을 더 분출시켰고, 동유럽 국가, 더 나아가 서유럽 국가들에 러시아에 대한 경계와 반대를 더 재촉했다. 전통적인 중립국인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정책을 통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중국 역시 이번 카자흐 사태 때 왕이 외교부장이 테러리즘·분리주의·극단주의 등 이른바 ‘3대 악’을 거론하면서 “중국은 외세로부터 카자흐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해,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보여줬다.
심장지대를 다시 장악하는 대륙세력의 부활은 가능한가? 2022년은 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