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구호단체 옥스팜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행사장 인근에서 주요국 정상들의 기후위기 대처 능력 부족을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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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인류를 포함한 지구의 안보를 가장 위협하게 될 문제는 무엇일까?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2012년 1월8일 70회 생일을 맞아 “핵전쟁이나 지구 온난화와 같은 재앙으로 인류가 1000년 이내에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1000년 이내”라는 시간은 먼 훗날일 수도 있지만, 가까운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인간의 더디기만 한 행보에 대해서도 탄식이 쏟아지고 있다. 일례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해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개막식에서 “인류는 기후변화에 있어 오래전에 남은 시간을 다 썼다”며 “지구 종말 시계는 자정 1분 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는 신냉전급 군비경쟁 중
기후위기에 비해 경각심은 덜하지만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경쟁 역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5대 핵보유국은 핵무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비공식 핵보유국인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란 핵협정의 부활 여부도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각종 군비통제 조약도 하나둘씩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19와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세계 군사비는 폭등하고 있다. 냉전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군비경쟁에 있었다면, 오늘날의 국제질서를 ‘신냉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 50여명이 지난해 12월 “인류를 위한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세계 각국이 5년 동안 매년 2%씩 군사비를 줄이고 이 가운데 절반을 전염병, 기후위기, 극한 빈곤 해결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안”에 호응하는 나라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린 데탕트’라는 표현을 떠올려봤다. 그린 데탕트라는 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유행했다. 기후변화를 포함한 환경협력을 통해 긴장 완화와 평화를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산림협력도 비슷한 취지를 품고 있다.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관점에서 그린 데탕트를 정의하고자 한다. “군사 활동 축소를 통한 기후위기 대처와 정치군사적 긴장 완화 사이에 선순환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기후위기야말로 모든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공동의 최대 안보 위협’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지구 온난화를 “우리 세계의 심각한 파괴력”이라고 부르면서 미국 국가안보에 “존재론적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둘째, 군사 활동 자체가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임에도 이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매우 저조하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군사 활동이 전세계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6%이다. 이는 항공(1.9%), 해운(1.7%), 철도(0.4%), 파이프라인(0.3%)을 합한 것보다 많다. 그런데도 지구라는 행성에 군사 분야는 마치 별개의 행성처럼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이 회원국들에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보고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군사 분야에서의 배출 보고는 여전히 ‘자발적인’ 영역으로 남겨두었을 정도이다.
셋째, 군사 활동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고 악화된 기후위기가 갈등과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극한 기후는 이미 분쟁의 주요 원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온이 섭씨 1도가 높아지면 폭행과 살인 등 개인들 사이의 폭력은 2.4%가 늘어나고 폭동과 내전과 같은 집단들 사이의 분쟁은 11.3%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끝으로 지난 몇 년 사이에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 협력이 꾸준히 진전되어 왔음에도 정치군사적 긴장과 군비경쟁은 오히려 고조되어왔다는 것이다. 가령 세계 양대 탄소배출국이자 군비지출 국가인 미국과 중국은 기후위기 대처 협력을 다짐하면서도 극심한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다. 기후위기에 기름을 붓고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자원을 군비경쟁으로 탕진하면서 말이다.
기후위기의 빈 구멍, 군사활동
이처럼 군사 활동은 기후위기의 주된 원인이면서도 기후위기 대처에 ‘거대한 예외지대’이자 ‘빈 구멍’으로 남아 있다. 기후위기라는 압도적인 힘에 대응하려면 비상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데, 상당수 국가들의 정치적 선택은 군비증강에 쏠려 있다.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지만, 지구촌의 군사 활동은 막대한 탄소를 내뿜으면서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국가안보의 중대한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는데도 정작 군사 활동 증대로 그 위협을 더 키우고 있다. 모두 안보라는 이름을 달고선 말이다. 그린 데탕트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기후위기와 신냉전의 슬기로운 대처법으로 군축을 지구적 의제로 삼아보자는 취지를 품고 있다.
그린 데탕트는 지구적 차원의 과제인 동시에 한반도에서도 절박한 과제이다. 우선 한반도는 세계에서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0.74도 상승한 데 비해 한국은 1.7도, 북한은 1.9도 상승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또 구냉전이 극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냉전이 한반도 상공에 엄습해오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이 무력 충돌 가능성까지 잉태하면서 남북한 공히 선택의 압력과 연루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아울러 한반도는 세계에서 군사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이고, 군사 문제 해결의 진전 없이는 남북관계 회복과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전화위복의 상상력과 실천을 요구한다. 기후위기 대처를 핵심 화두로 삼으면, 한반도 평화와 국제적 신냉전 대처에도 전환기적 발상과 실천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린 데탕트를 지구적 의제로 제시하면서 한반도에서부터 시작해보자고 제안하는 까닭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