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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프랑스, 우크라 전쟁서 ‘유럽의 균형자’ 자리 빼앗기나

등록 2022-04-09 08:29수정 2022-04-09 09:34

[한겨레S] 지정학의 풍경
‘중재자’ 입지 축소되는 프랑스

유럽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형 진화
지역 세력 균형의 ‘고정상수’ 구실
우크라 전쟁서 중재자 제몫 못해
터키 등에 ‘균형자’ 넘어가는 양상
우크라이나 위기 타개를 위해 중재 외교에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월7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긴 탁자를 두고 대면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 이를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으로 평가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위기 타개를 위해 중재 외교에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월7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긴 탁자를 두고 대면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 이를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으로 평가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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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앞서 이를 막기 위한 외교적 중재를 가장 적극적으로 펼친 나라가 프랑스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순방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등 방문국 정상들과 직접 회담을 하면서 외교적 중재를 펼쳤다. 마크롱은 우크라이나의 핀란드식 중립화를 제안해 큰 관심을 끌었으나, 우크라이나가 일축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중립화 제안에 주제넘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크롱이 처음으로 공식화한 중립화는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할 타협안의 핵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유럽 세력균형의 추, 프랑스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기 위한 프랑스의 중재와 그 좌절은 유럽에서 프랑스가 갖는 지정적 역할과 한계를 드러내는 좋은 사례이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지정학의 핵심은 세력균형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이 맞으면 평화가 찾아지고, 그것이 깨지면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됐다. 유럽의 근대를 연 17세기 30년전쟁, 나폴레옹 전쟁, 1·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세력균형이 파괴되며 일어났고, 30년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체제,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는 빈 체제 등은 세력균형으로 유럽의 평화를 구현한 사례이기도 하다.

유럽의 세력균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요구받았던 나라가 프랑스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지정학은 ‘유럽의 균형자’라고 불린다. 이는 몸집이 너무 커지거나 작아져도 유럽의 세력균형에 위기를 부르는 독일의 지정학인 ‘독일 딜레마’와 대비된다.

프랑스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인 관료 체제를 구축하고 국민국가 체제를 선도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일찌감치 그 국토 영역을 획정해 유지하고는,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로 진화했다. 이는 유럽의 세력균형에서 프랑스를 고정 상수로 만들었다. 즉, 영역과 세력이 부단하게 부침했던 독일 등 유럽 대륙의 다른 국가들을 견제하거나 힘을 실어주는 상수가 되어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거나 요구받았다.

프랑스의 ‘유럽의 균형자’ 구실은 그 지리적 위치도 한몫했다. 프랑스는 유럽이 발원했던 지중해뿐만 아니라 유럽이 세계로 뻗어나갔던 대서양 모두에 접해 있다. 또 유럽의 지리적 특성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북유럽평원이 시작되는 서단에 있다.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 중부부터 시작되는 북유럽평원은 베네룩스 3국, 독일, 폴란드 등을 거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대평원이다. 북유럽평원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열강이 세력을 투사하는 통로였다. 프랑스는 두 개의 바다와 북유럽평원을 끼고 있는 서유럽 한가운데의 양호하면서도 전략적인 지리적 위치로 국력을 신장하고 투사하는 데 유리한 입지를 지녔다.

유럽의 근대를 낳은 30년전쟁에서 프랑스는 구교이면서도 신교 동맹에 가세해, 합스부르크 제국이 주도한 구교 세력을 견제하는 구실을 했다. 30년전쟁에서 프랑스의 역할과 전략은 국익과 세력에 바탕을 둔 ‘레알폴리티크’의 원조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주의와 공화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국민동원체제를 완성한 프랑스는 세력균형을 파괴하고 유럽 전체를 전면전으로 몰아넣은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가 신중한 균형자 구실을 넘어선 후폭풍은 독일 통일을 불렀고, 이는 프랑스로 하여금 다시 독일을 견제하는 유럽의 균형자 역할로 돌아가게 했다. 통일 이후 몸집을 불리던 독일에 맞서 프랑스는 결국 러시아와의 동맹을 체결하고, 이는 영국까지 가세하는 역사적인 3국협상으로 이어졌다. 3국협상은 1차대전을 막지는 못했으나, 독일의 유럽 석권을 막는 최대 역할을 했다. 1차대전 때 프랑스는 마지노선이라는 불리는 북유럽평원 전선에서 독일을 막는 사투를 벌여서, 연합국 승리의 교두보가 됐다.

1차대전 이후 프랑스는 독일을 너무 견제하는 데 몰두하다가, 오히려 그 부활을 부르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무리한 배상금을 물리고, 영토를 박탈하는 등 독일의 현실적 위상을 인정하지 않는 베르사유 체제를 밀어붙이다가, 이에 반발한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을 부르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유럽에서는 미국이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철수하고, 영국은 유럽 대륙 개입에 소극적인 ‘영예로운 고립’ 노선을 고수하고, 러시아는 소련 체제 성립으로 국제질서에서 추방된 상황이었다. 프랑스만이 불만에 차고 힘이 커지는 독일 견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결국 그 희생양이 되면서 2차대전이 발발했다.

2차대전 이후 프랑스는 독일과의 숙명적인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는 동반자 관계로 유럽의 독자성이라는 대외적인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외교 전략을 취해왔다. 프랑스는 43년 동안 나토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인 핵무력 같은 국방력을 추구하는 등 비미 노선을 취했다. 이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이라는 압도적인 세력들에 맞서 유럽에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려는 시도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세력균형 측면에서 보자면, 나치 독일의 부상을 부른 2차대전의 전야를 상기하게 한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인도-태평양으로 전략적 비중을 옮겨서 유럽에서 힘을 비워왔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해 미국 쪽으로 더욱 다가섰다. 그럼에도 미·영은 나토 동진을 밀어붙여서, 러시아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프랑스는 독일과 손잡고 에너지 분야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증진하려 했으나, 미국은 이를 반대해 왔다.

터키로 넘어간 ‘균형자’ 역할

프랑스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에 적극적으로 중재 외교를 펼친 것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프랑스가 제안했던 우크라이나 중립화란 결국 러시아의 세력권을 일정 정도 인정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이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는 러시아와 관계를 안정시켜 유럽의 독자성을 세우려고 했다.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되면, 결국 러시아를 막기 위한 독일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고, 이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입지와 역할을 축소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중립화를 둔 협상은 이제 터키의 중재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변화하는 국제질서에서, 유럽의 위상뿐만 아니라 유럽의 균형자를 자임하는 프랑스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2월7일 긴 탁자의 양끝에서 착석한 마크롱과 푸틴의 모습은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 유럽에서 프랑스의 역할을 암시적으로 보여줬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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