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3월 벨기에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본부에서 열린 임시 정상회의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오른쪽 악수하는 이) 등과 인사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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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독립 행보를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국가가 터키이다. 터키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을 적극 중재해, 지난 3월29일 이스탄불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화를 원칙으로 하는 협상을 유도했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발한 스웨덴과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반대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전쟁 대책에 구멍을 내고 있다.
2차대전 뒤 나토에 가입해 중근동에서 미국의 오래되고 순치된 동맹이었던 터키의 이런 비미적인 독립 행보는 집권 20년을 눈앞에 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8) 대통령이 주도한다. ‘현대의 술탄’이라는 그가 내부적으로는 권위주의적 통치, 외부적으로는 터키의 영화 재건을 내세운 터키 세력권 확장이 배경이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성향도 작용하지만, 터키의 역사적인 지정학이 근본 동력이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는 전성기인 17세기에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빈 인근까지, 북쪽으로는 크림반도 이북까지, 동쪽으로는 카스피해 남단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반도의 아덴만까지 장악한 거대 제국이었다. 그 핵심 영역인 동지중해 연안은 고대 때부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우마이야조 등 이슬람 제국, 셀주크튀르크 등 제국과 문명의 요람이었다. 유럽과 중근동을 잇고, 유라시아의 내륙과 연안을 잇고, 더 나아가 실크로드의 터미널로서 중국·인도 등 동양과 유럽의 서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문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동지중해 연안 중에서도 마르마라해 영역, 즉 이스탄불 등 현재 터키의 유럽 쪽 영토 및 본토 사이의 연안 지대는 고대 이후 최고의 지정학적 요충이었다. 좁은 보스포루스 및 다르다넬스 해협이 남북으로 위치한다. 유럽과 아시아가 이 해협들로 갈라지고, 흑해와 지중해가 연결된다. 교역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요충일 수밖에 없다.
마르마라해를 장악한 세력은 근대까지 어김없이 제국으로 일어섰다. 그 마지막 제국이 오스만튀르크이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직항로가 개발되고,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마르마라해를 포함한 동지중해 연안의 교역 비중도 줄었다. 오스만 제국이 쇠락한 근본 이유이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던 16세기는 이미 아시아 직항로가 열려서, 세계 지정학 질서에 중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 때이다. 동지중해 연안의 교역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유럽의 비중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건조하고 산악지대인 소아시아 쪽에 비해 기후와 생산력이 좋은 발칸반도의 서북쪽으로 진출했고, 이는 빈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1529년에 빈 공략을 실패한 데 이어 1683년에도 좌절됨으로써, 쇠락이 본격화됐다.
오스만의 빈 진출 시도와 좌절은 근대 이후 터키의 서구 지향을 둘러싼 안팎 갈등의 시작이었다. 즉, 근대 이후 터키의 지정학적 역사는 유럽으로의 편입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고 했으나, 유럽 쪽의 거부와 내부의 갈등으로 점철됐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쇠락하자, 유럽 열강 사이에서는 ‘동방 문제’가 부각됐다. 쇠락하는 오스만의 영역으로 러시아가 진출해서, 지중해와 중근동까지 장악하려는 남진 정책을 펼쳤다. 서구 열강들로서는 오스만 제국이 지도에서 사라진다면, 러시아의 남하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이 파괴될 것으로 우려했다. 이는 결국 19세기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최대의 제국주의 전쟁인 크림전쟁을 야기하고, 더 나아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원인이 됐다.
1차대전 패전 뒤 터키는 영토가 현재 영역으로 축소됐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주도한 혁명으로 공화정으로 바꾸고, 서구화·세속화 개혁을 진행했다. 2차대전 뒤에는 숙적인 러시아를 잇는 소련의 팽창에 위협당하자, 나토에 가입해 충실한 서방 동맹이 됐다. 1962년 미-소의 핵전쟁 문앞까지 몰고 간 쿠바 미사일 위기의 근원 중 하나는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대소련 미사일망이었다. 터키의 서방 지향은 유럽연합 가입 시도로 절정에 올랐다.
유럽 국가들의 거부로 그 가입이 사실상 좌절된 2000년 전후로 중근동뿐만 아니라 세계 지정학 질서에 변화가 일자, 터키의 역사적인 서방 지향성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2003년에 집권한 에르도안은 터키의 서방 지향성을 둘러싼 터키 안팎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케말의 근대화 개혁 이후 터키에는 근대적인 세속화 세력과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 사이의 갈등이 상존했다. 세속화 세력은 지역적으로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마르마라해 연안 도시 지역의 중상류층이고 군부가 그 보루였다. 보수적 이슬람 세력은 아나톨리아고원 내륙 지역의 무슬림 대중을 기반으로 한다.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이슬람주의를 기반으로 집권한 첫 세력으로, 터키의 세력 교체를 의미했다.
케말 이후 서구화 지향의 세속화를 추진했던 군부 중심의 세력이 쇠퇴하는 시점에 터키 주변에서 지정학 격변이 일었다. 이라크 전쟁, 아랍의 봄,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의 출현, 아프간 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인한 기존 중근동 지역 정권들의 붕괴가 일어났다. 중국의 부상 앞에서 미국은 중동 분쟁 수렁에서 탈출을 시도해, 중동의 세력 공백과 재편은 가속화했다. 특히,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 개입을 계기로 중동에서 다시 입지를 확장했다.
나토에서 병력으로는 2위인 터키로서는 기존의 질서가 허물어지는 주변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분쟁이 터키의 최대 안보 사안인 쿠르드족 분리독립으로 번지지 않게 하고, 이란·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 등 중동 강국들의 영향력 확장을 억제하고, 미국과 남하하는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취해야 하는 과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됐다.
이는 기존 질서의 담지자였던 미국과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했다. 지정학적 요충인 마르마라해를 쥐고 있는 터키는 우크라이나 전쟁 앞에서 그 지정학적 비중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이는 터키의 재부상인가, 아니면 강대국에 ‘낀 나라’의 과대망상인가? 에르도안의 터키가 러-우크라 평화협상을 중재하고, 스웨덴·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는 데 오기까지 지난 2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야 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