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주변에서 24일(현지시각) 발생한 화재를 찍은 유럽우주국(ESA)의 위성 사진. 유럽우주국 로이터 연합뉴스
방사능 사고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전에 대한 전력 공급이 25일(현지시각) 한때 완전히 차단됐다가 복구돼 가까스로 사고를 피했다. 우크라이나 쪽은 러시아군이 인근 화력 발전소를 공격해 전력이 끊겼다고 주장한 반면 러시아 쪽은 우크라이나군의 도발로 원전 인근 숲에 불이 난 탓이라고 주장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자포리자 원전 인근 석탄 화력 발전소의 폐기물 저장소를 공격해 불이 나면서 원전에 대한 전력 공급이 한시간 동안 끊겼다고 밝혔다. 그는 정전이 발생하자 직원들이 비상용 경유 발전기를 가동해 전력을 다시 공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발전소 직원들이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방사능 사고에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유럽인들을 방사능 재앙 직전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영 원전 운영사인 에네르고아톰은 원자로 냉각 시스템과 원전 관리 시스템에 전력 공급이 완전히 끊긴 건 이 원전 가동 이후 처음이라고 밝혔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체 전력의 20% 정도를 공급하고 있는 자포리자 원전에는 모두 6기의 원자로가 있으며 현재 2기가 가동 중이다. 이 원전과 우크라이나 국가 전력망을 연결하는 전력선은 4개 가운데 3개가 원전 주변 전투 와중에 끊겼고, 예비용 전력선도 3개 가운데 하나만 정상이라고 에네르고아톰이 전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날 정전이 우크라이나군의 도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원전이 있는 에네르호다르 지역의 러시아 쪽 정부 관리인 블라디미르 로고프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위성 사진을 보면 원전 인근 숲에 불이 난 것을 알 수 있다”며 이 화재로 마을 전체가 몇시간 동안 정전됐었다고 밝혔다. 그는 “(정전은) 젤렌스키의 군인들이 도발해서 원전에서 공급되던 전력이 끊겼기 때문”이라며 “정전 자체는 화재에 따른 전력선 합선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지난 3월 초 장악한 자포리자 원전은 7월 중순부터 주변 지역에서 전투가 격화한 탓에 안정적인 운영을 위협받고 있다. 러시아군이 원전 시설을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원전 단지 내 시설이 폭격을 당하는 일이 잦아졌고, 두나라는 서로 상대방이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원전 현장 조사를 추진하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며칠 안에 조사단이 현장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은 이날 <프랑스24> 방송 인터뷰에서 조사단 파견을 위한 협상 타결이 “아주, 아주, 아주 임박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 조사가 “극도로 복잡한 사안”이라며 “우리가 빠르게 현장에 가서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이었던 전날 발생한 우크라이나 중부 차플리네 기차역 폭격 사고의 사망자는 3명이 늘어 모두 25명이 됐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전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사일로 이 기차역을 공격한 것을 인정했으나, 공격 대상은 군용 열차였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이날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군인 200명 이상이 숨졌다고 덧붙였다.
한편,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군 전투 병력을 내년 1월부터 13만7천명 늘리는 내용의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지난 2017년 11월 전투 병력 규모를 이듬해부터 101만여명으로 고정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는데, 이번 조처로 내년부터는 전투 병력이 115만여명으로 늘게 된다.
이번 조처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데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침공 와중에 발생한 군인 사상자 규모를 정확히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미국 정보기관들은 피해 규모를 전사자 1만5천명 이상, 부상자 4만5천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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