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도착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빈 살만 왕세자가 맞이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인공지능(AI) 기술로 제어하는 연중 온화한 기후, 사막 위 심어진 푸른 나무들, 세계 최고층 빌딩보다 더 높은 500m 빌딩, 로봇 가정부를 두고, 학교·직장까지 5분 거리….’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달 26일 사우디의 경제수도 제다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신도시 사업의 일부를 발표했다. 2017년 계획한 대형 신도시 프로젝트 ‘네옴시티’의 일부인 ‘더 라인’(미러 라인)의 조감도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 도시는 인류가 도시 생활에서 직면한 난제를 해결하고 대안적 생활 방식을 제시할 것”이라며 “전통 도시들에 도전할 ‘문명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미러 라인’의 조감도에 그려진 것은 황량한 사막 위에 만들어진 거울 외벽을 가진 직선 도시였다. 도시의 너비는 200m, 길이는 무려 170㎞에 달한다. 2030년까지 완성하겠다는 이 도시에 대해 빈 살만 왕세자는 “자동차와 탄소배출이 없으며 100%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친환경 스마트 도시”라고 설명했다.
세계 언론의 반응은 차가웠다. 현실에서 구현이 불가능한 구상인데다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달 29일 <워싱턴 포스트>는 “호화로운 초고층 빌딩에 푸른 정원이 펼쳐진 멋진 신도시의 경치를 상상해보자. 이 지상낙원엔 대기오염 따위는 없고 녹지와 편의시설, 초고속 대중교통이 있다. 다만, 외딴 사막에 있고, 홍보용 영상으로만 존재해 실제 갈 수가 없다”고 평가했다. 현재 네옴시티가 건설되는 사우디 북서부 타부크주의 위성 사진을 보면, 미러 라인의 건설 예정지인 황야의 사막엔 구조물 몇채와 공사 중인 수영장·축구장·골프장 일부가 관찰될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5년 전 석유 중심 경제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국가 장기 프로젝트 ‘사우디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5000억달러(약 668조원)를 투자하는 최첨단 미래형 친환경 도시인 ‘네옴’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홍해 인근 사막 2만6500㎢에 지어지는 네옴시티는 서울의 44배 규모로, 쿠웨이트나 이스라엘보다도 넓다. 사우디는 네옴시티 안에 바다 위 산업단지인 ‘옥사곤’, 사막 위 스키장을 갖춘 관광단지인 ‘트로제나’, 지난달 발표한 직선 도시 ‘미러 라인’을 만들어 총 900만명의 인구를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이다. 이 사업을 완성하는 데 약 1조달러(약 1300조원)가 들 것이란 전망이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 보이는 이 초대형 신도시에는 석유 부국 그 이상의 사우디를 꿈꾸는 빈 살만 왕세자의 야심이 가득 차 있다. 사우디의 젊은 실권자는 2017년 6월 불과 32살의 나이에 사우디 왕국의 왕위 계승 1순위가 됐다. 아버지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형제간에 왕위를 이어가던 사우디에서 애초 1순위 계승자이던 조카를 폐위하고 자신의 친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전격 책봉했다.
갑작스레 권력을 쥔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확고히 만들기 위해 분명한 실적을 거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사우디 비전 2030’이었다. ‘오일머니’로 쌓아 올린 불안한 경제 구조를 다각화해 사우디를 현대적 산업 경제를 가진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와 동시에 ‘인권 후진국’이란 악명을 벗기 위해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는 등 나름의 개혁 조처도 쏟아내며 합리적인 차세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1일 “네옴의 가장 큰 문제는 비용과 규모가 아니다. 권력 의지의 거대함이 (네옴의) 디엔에이(DNA)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네옴시티 홍보 영상에 출연한 빈 살만 왕세자. 네옴 누리집 갈무리
네옴시티 핵심 사업 ‘더 라인’의 조감도. 네옴 누리집 갈무리
빈 살만 왕세자는 ‘친환경’ 간판에도 욕심을 냈다. 지난해 11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를 앞두고 ‘사우디 그린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켜 206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그의 행보가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이라고 비판한다. 국제 기후변화 협상 전문가인 조애나 디플레지(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는 지난 2월 <비비시>(BBC)에 “사우디의 계획이 처음엔 기후 논의의 중요한 진전으로 여겨졌지만 철저한 조사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네옴시티 계획에 대해서도 호화로움만이 강조된 전혀 환경친화적이지 않은 ‘슈퍼 리치’용 도시일 뿐이라고 혹평하는 견해가 많다.
이 사업은 사우디의 처참한 인권 실태를 드러내기도 했다. 네옴시티의 건설 부지는 유목민 후와이타트 부족이 사우디 왕국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살던 땅이었다. 이 공사가 시작된 뒤 약 2만명이 강제 이주 위기에 몰리게 됐다. 2020년 4월엔 강제 퇴거 방침에 항의하는 영상을 촬영해온 운동가 압둘 라힘이 사우디 보안군에게 처형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사우디 인권단체 ‘알쿠스트’의 부이사 조시 쿠퍼는 2020년 5월4일 <가디언>에 “빈 살만 왕세자가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한 뒤 부족한테 세 개의 마을을 비우게 하고 강제 이주시켰다. 네옴은 국내 엘리트들과 국제 관중을 겨냥한 허영 프로젝트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가디언> 역시 “이 도시는 사우디 인권 침해의 암울한 상징”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사우디에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2018년 10월 발생한 저명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암살은 개혁적으로 보였던 젊은 왕세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에 큰 그늘을 드리웠다. 올해 사우디에서 각종 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이는 81명에 이른다. 캐나다에 망명한 사우디의 전 장관 칼리드 자브리는 지난달 29일 <워싱턴 포스트>에 “빈 살만은 극악무도한 인권 기록에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디스토피아적인 허영심을 자극하는 신도시를 계획했다”며 “무관심한 서방 지도자들은 그가 잔혹행위를 벌인 뒤 지문을 숨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신도시 사업으로 인해) 그를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야심 찬 계획은 미국과 관계에도 미묘한 영향을 주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15일, 취임 이후 처음 사우디를 방문했다. 카슈끄지 암살 이후 빈 살만 왕세자를 ‘국제적 왕따’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며 석유 가격이 급등하자 증산을 부탁하기 위해 회담에 임한 것이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의 태도는 냉랭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미국이 사우디의 개발 계획에 적극 참여를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꼽고 있다. <시엔엔>(CNN)은 지난달 18일 “빈 살만은 사우디에 대한 백악관의 명확한 전략을 원한다. 특히 야심 찬 ‘비전 2030’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사업들에 대해 미국이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원한다”고 분석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이 네옴시티 개발 사업 등에 대규모 투자와 인재 교류를 해주길 원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석유 증산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는 해석이다.
이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 한국은 네옴시티 계획의 핵심 사업을 수주해 ‘케이(K)건설’ 부흥을 노리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현대건설·삼성물산 등 주요 건설업체들은 ‘제2의 중동 건설 붐’을 목표로 더 라인 사업의 수주전에 뛰어들고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30일 국토교통부가 개최하는 글로벌 인프라 협력 콘퍼런스(GICC)에서 내한한 네옴시티 프로젝트의 투자총괄책임자(CIO)를 만난다. 10월 말~11월엔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을 찾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막대한 규모의 투자 계획인 만큼, 사우디를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와 정치경제적 위험 요인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은 “빈 살만 왕세자가 개발하는 미래 도시는 공상과학소설의 어떤 도시보다 화려한 것처럼 보인다. 네옴의 비전은 매력적이지만, 만약 그것이 달성되면 수십억달러의 오일머니를 건설에 투입한 사우디의 경제 전망은 정말로 암울할 것”이라고 평했다.
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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