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총회가 23일(현지시각) 국제 조세 정책 등을 논의할 기구 창설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본부/AP 연합뉴스
유엔 총회가 23일(현지시각) 다국적기업 등에 대한 공평한 과세 등 국제 조세 정책을 논의할 유엔 차원의 기구 창설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조세 정의 운동 단체들은 이 결의안이 조세회피 등에 대응하기 위한 역사적인 성과라고 환영했다.
유엔 총회는 이날 아프리카연합 소속 54개국이 제안한 ‘유엔에서의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국제 조세 협력 촉진’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고 발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결의안은 부자나라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도하던 조세 정책 논의를 내년부터 유엔 주도로 바꾸는 내용이라고 전했다.
미국 등 일부 국가가 제기한 수정안이 부결된 뒤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의안은 국제 조세 협력을 위한 체계나 기구 창설을 포함한 세금 정책 논의를 유엔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유엔 사무총장에게 유엔 회원국들이 주도하고, 활동 시한이 없는 특별 정부간 위원회 구성 방안 등 후속 조처를 마련해 제출하도록 했다.
다국적기업 등의 조세 회피에 대응해온 국제 운동단체들은 이 결의안이 세금에 관한 유엔 협정과 새로운 조세 관련 기구 창설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조세 정의 네트워크’의 앨릭스 코범 사무총장은 “오늘 역사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유엔 회원국들이 전세계 세금 문제에 관한 규정 제정을 유엔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로 옮긴 용감한 행동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10년 가까운 동안 (조세 개혁) 시도를 한 이후에도 애초 약속했던 것을 이루지 못해, 전세계가 한해에만 조세 회피로 4830억달러(약 641조원)의 세수 손실을 보고 있다”며 “내년 시작될 국가간 논의는 국제 과세의 새 시대를 여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아프리카연합 소속 국가들이 결의안을 제안한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은 국제 사회의 결의안 지지를 호소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가 그동안 이 문제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유엔이 주도하는 투명하고 포괄적인 토론장을 대체할 논의의 장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주장했다.
미국 등 부자나라들은 이 결의안 채택을 막기 위해 막판까지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미국, 일본 대표 등은 지난해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마련한 다국적기업 등에 대한 과세 방안을 거론하며 이 방안이 제대로 이행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남아공, 나이지리아 등은 유엔이야말로 진정한 국제 기구라며 개도국들의 ‘개발 권리’ 옹호를 위해 결의안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결의안은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마련해 136개국의 동의를 얻은 과세 개혁 방안이 일정대로 내년 중반부터 시행되기 어려워진 가운데 나왔다. 이 방안은 거대 다국적기업에 대해 본사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 영업이 발생한 나라에 세금을 내도록 하는 내용과 조세 회피를 막기 위해 전세계가 법인세율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하는 내용인데, 미국의 의회 승인 등 각국의 후속 조처가 늦어지면서 언제부터 시행될지 불투명한 상태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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