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AP 연합뉴스
미국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자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러시아가 거부했다고 스위스의 유력 일간지가 보도했다. 미국 당국은 이를 부인했으나,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미-러 ‘막후 협상설’이 퍼진 가운데 나온 보도라 이목을 끈다.
스위스의 유력 독일어 일간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ZZ)은 2일(현지시각) 독일 쪽 소식통들을 인용해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장(CAI)이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 영토의 20%를 할양하는 조건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평화 계획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독일 유력 정치인들의 말을 빌어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장기전을 피하려는 평화계획의 일환으로 영토 할양 내용이 담긴 이런 제안을 했다고 밝혔다.
번스 국장이 1월 중순께 키이우를 비밀리에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났다는 것은 <워싱턴 포스트>의 지난달 19일 기사로 공개된 바 있다. 신문의 주장은 이때 번스 국장이 모스크바에까지 가 푸틴 대통령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이 제안에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를 러시아에 할양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는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 등 동부 지역의 크기와 대략 비슷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 모두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영토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러시아도 자신들이 “어쨌든 장기적으로 전쟁에 이길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양쪽 모두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달 25일 우크라이나가 줄곧 요구해온 미국의 에이브럼스 등 주력 전차 지원을 약속했다는 게 신문이 전하는 막후 협상설의 큰 그림이다.
백악관과 중앙정보국은 이 보도를 즉각 부인했다. 숀 데이벳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대변인은 이 보도가 “정확하지 않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중앙정보국의 한 관리도 “완전히 틀렸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은 나아가 이 정보를 자신들에게 알린 2명의 독일 정치인들을 인용해 미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대처 방안을 놓고 갈라서 있다고 말했다. 번스 국장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중국에 집중하기 위해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를 원하는” 반면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규칙 기반의 평화질서를 러시아가 와해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를 원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군사지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화 교섭의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면서, 미국이 장기적 소모전을 준비하는 게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고 믿는다고 이 소식을 전한 두 독일 정치인 가운데 한명이 말했다. 그는 이에 따라 독일도 이 전쟁에 말려들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드미트리 폴리안스키 주유엔 러시아 제1부대사는 <뉴스위크>에 이 보도가 “흥미롭다”면서도, 추측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앞서, 드리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협상은 “이를 위한 실질적으로나 법적으로나 환경이 안되기 때문에 현재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미국과 러시아가 막후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는 최근 들어 외교가 주변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포스트> 외교 전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지난달 24일 ’블링컨,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질서에 숙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와 직접 대결을 피하려 하고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보장은 나토 가입이 아닌 자체 국방력 강화를 통해 실현하며 △어떤 형태로든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실질적 영유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나아가 “워싱턴과 키이우에서는 군사력으로 크림 반도를 회복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광범위하다”며 “단기적으로 키이우에게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자신들에 대한 공격 기지로 기능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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