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10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사당 앞에서 대통령 취임 연설을 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FP 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 출신인 하비에르 밀레이(53)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 지출 감소’ 등 충격 요법을 예고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제장관과 중앙은행 총재에 전통 우파 인사들을 기용하며, 미국 달러화의 법정 통화화 등 자신의 극단적 공약 이행에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밀레이 대통령은 10일 취임 선서 직후 의회 앞 광장에서 연설에 나서 “전임 정부가 우리에게 초인플레이션으로 가는 길을 남겼다”며 “우리는 이 재난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아르헨티나의 10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143%나 올랐다.
이어, 경제를 살리려면 “재정 충격 요법 외에는 대안이 없으며 이는 고용에 영향을 끼치고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동반 현상)을 부를 것”이라면서도, 이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 아르헨티나는 “지난 12년과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조처가 “아르헨티나가 부활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삼켜야 하는 약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레이 대통령은 정부 부처를 기존의 18곳에서 9곳으로 줄이고,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국내총생산(GDP)의 5%에 해당하는 재정을 재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취임식에는 세계의 주요 극우 인사들이 총집결했다.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의 산티아고 아바스칼 대표, 칠레 공화당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대표 등이 자리에 함께했다. 오르반 총리는 소셜미디어에 쓴 글에서 “우파가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밀레이는 2010년대부터 방송 출연 등으로 인지도를 높이다 정치에 뛰어들어 중앙은행 폐지, 미국 달러화의 법정 통화화, 총기 보유, 장기 매매 합법화 등 극단적인 정책을 내세우며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지난 8월 대통령선거 예비선거에서 1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10월22일 치러진 본선에선 2위를 기록한 뒤 지난달 19일 결선에서 여당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 전 경제장관을 11%포인트 차이로 따돌리고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긴 뒤엔 통화 주권 포기를 의미하는 중앙은행 폐지나 달러화 도입 등 극단적 정책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는 새 정부의 핵심 경제팀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신임 경제장관엔 2015~2019년 집권한 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 아래서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루이스 카푸토가 지명됐다. 카푸토는 달러화 도입에 비판적인 인물이다. 중앙은행 총재 내정자로 선택된 이 역시 달러화 도입을 주장하던 측근 에밀리오 오캄포가 아닌 마크리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산티아고 바우실리였다.
나아가 대외 정책에서도 강경 자세를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밀레이는 선거운동 과정에선, 브라질·로마 교황청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중국과도 관계를 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최근엔 중국 등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브라질과 중국은 아르헨티나의 총 교역액 기준으로 1·2위를 차지한다.
밀레이가 내걸었던 ‘자유지상주의 실험’이 성공하려면 해결해야 할 걸림돌이 많다. 아르헨티나의 순 외환 보유액은 -100억달러이고, 내년 1월까지 갚아야 할 외채도 40억달러에 이른다. 이 나라의 빈곤층은 인구의 40%에 이른다. 집권여당인 자유전진당의 의석수가 하원의 15%, 상원의 10%에 불과한 점도 부담이다. 경제 정책 추진을 위해서는 중도우파 연합인 ‘변화를 위해 함께’ 등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