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즐거움은 작은 평화의 몸짓이다. 자마 마스지드 시장 한 모퉁이에서 그렇게 작은 평화와 만났다.
“무얼 말하더라도 그 반대도 진실인 곳 인도”
델리의 하루는 소음으로 시작된다. 델리에 도착한 첫날 아침, 뉴델리 동남쪽 서민지역인 칸푸르의 시장 골목에서 쉴 새 없이 오가는 버스와 오토릭샤의 ‘빵빵빵빵’ 경적소리, 사람들의 날아갈 듯한 바쁜 몸짓, 발 하나 디딜 수 없는 것 같은 버스 문간에 서너명씩 매달린 출근길의 젊은이들은 숨가쁜 인도 사회의 한복판으로 단숨에 우리를 끌어들였다. 정신을 쏙 빼놓게 만드는 델리의 소음은 생생하게 삶의 치열함과 고단함, 활기를 실어 나른다. 첫 인도 여행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인도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있다거나, 인도는 명상과 깨닫음의 땅이라는 ‘환상’이 싫었다.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여정을 ‘길’로 여기지만 그 길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필사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터전’이다. 흔히 ‘제3세계’라고 불리는 곳에 갔을 때, 현대인들은 자기가 오래 전 떠나온 어떤 것을 타인의 삶에서 발견하고 감탄하기 쉽다. 그렇지만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때로는 악다구니를 쓰며 좀더 행복한 삶을 향해 몸부림친다. 나도 마찬가지고, 인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명상의 땅에서 현실의 불만과 불평등을 덮어두고 초월한 채 살아가는 순종적인 인도인이라는 이미지는 정복자나 지배자, 식민통치자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런 겹겹의 장막을 걷고, 인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낯선 이방인인은 아이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다.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든 입고있는 옷이 다 낡아있든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녀석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게 작은 기쁨일 따름이다.
델리는 인도 역사에서 오랫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남서쪽 아라발리 언덕과 서부 야무나강가를 끼고 있는 델리는 북서부 인도에서 겐지즈 평원으로 나가는 위치에 있어 오랫 동안 교역과 정치의 중심지가 됐다. 현재도 6만여채의 역사적 건물과 기념비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차를 타고 다니다가 모퉁이마다 버려진 듯 별다른 표지도 없이 서 있는 오래된 거대한 탑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3천년 전에 성립된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델리는 BC 5000년께 세워진 판다바스 왕국의 수도 인드라프라스트로 나타난다고 한다. 힌두어 문헌에서는 산스크리트어로 ‘하스티나푸르’로 불렸는데, 코끼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지금 델리가 서 있는 자리에는 8번의 도시가 세워졌다. 각 왕조가 건설하고 다시 폐허가 됐던 자리 위에 17세기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가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옮기며 건설한 7번째 델리는 오늘날 ‘올드델리’로 대부분 보존돼 있다. 올드 델리의 유명한 ‘관광명소’가 된 레드 포트나 자마 마스지드는 샤 자한 황제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이다.
분홍 원색의 화려함은 막 결혼을 한 그녀와 잘 어울렸다. 망사 틈 사이로 보인 표정에서 행복을 기원하는 소중한 염원이 보인다. 그녀에게 놓인 새로운 삶은 신이 함께 하기에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훨씬 크다.
힌두교사원에서 만난 이 신도는 아무리봐도 얼렁뚱땅^^ 요가수련자인 듯 싶다. 카메라의 앵글이 향하는 곳 마다 은근히 자리를 옮기고는 여러 자세를 취하곤 했다. 드디어는 한쪽 다리까지 올리며 포즈를 잡아주었다. 일부러 카메라를 고정한 채 가만히 있으니 한참을 이 자세를 잡아주었다. 살짝 든 장난기에 끝까지 그대로 있었더니 힘이 들긴 했는지 왼손으로 살짝 들고있던 발바닥을 잡아준다. 아무리 봐도 얼렁뚱땅임에 틀림이 없다.
이른 아침 출근길. 큰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이들이 줄을 지었다. 누구는 오른손에, 누구는 오른발에, 누구는 버스에 매달려 바짝 힘을 준다. 신호만 떨어지면 냉큼 달려갈 기운이다.
엉덩이를 꺼내놓은 녀석은 사원 주변을 맴도는 아이였다. 자그마한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고 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조금 살이라도 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몇 루피라도 쥐어줄 걸 그랬나.
그렇지, 내가 인도에 오게 된 이유는 전세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떠오르는 인도’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델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 옆자리에 앉은 구르미트 단잘은 델리 출신의 시크교도다. 대학에서 무역을 전공한 뒤 다시 컴퓨터를 공부해 인도의 IT기업에서 일하다가 3년 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있는 신카타(Syncata)라는 IT 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가족들은 델리에 살고 있어서 오랜 만에 일과 휴가를 붙여서 델리로 돌아가는 길이다. 인도 IT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묻자 그는 “컴퓨터와 IT를 전공해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좀 하는 학생들이 모두 그쪽에 몰렸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에선 일자리를 못 잡으면 햄버거 가게 점원으로라도 일하면서 어느 정도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인도에선 그런 ‘중간’의 삶이 없다. 모두들 일자리와 안정된 삶을 위해 컴퓨터나 IT 기술을 배우러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관리들이 잘해서 인도의 성장이 이뤄진 것도 아니고 관리들은 현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며 “기업가나 기술자 등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인도 경제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용하지만 냉철해 보였다.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잠깐 자리를 뜨더니 시크교 특유의 7m가 넘는 긴 두건을 머리에 칭칭 감고 돌아왔다. 공항에는 예닐곱살된 딸이 나와 아빠를 반긴다. “실력도 있고 임금도 싸고, 영어도 잘해” 전세계 IT 기업들이 주목하는 인도인 IT 전문인력의 삶이다.
내게 무언가를 바랄거라는 생각은 미리 새겨둔 허상이다. 낯섦에 대한 관심은 아이들이나 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일 따름이다. 결국 서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는 입장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입장이다.
대상을 찾은 뒤 렌즈의 촛점 위치를 정할 때면 약간의 망설임이 있다. 눈에 맞출까. 아니면 어디에 맞춰야하지. 망설임은 순간이고 마음이 정해준 대로 손놀림이 따른다. 그래 손이 더 낫겠는걸.
처음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내린 것은 새벽이었다. ‘IT 강국’ 인도의 명성에 비해 너무 아담하고 낡은 공항이다. 한밤 중인데도 후끈하는 열기를 뚫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길, 한밤 중인데도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는 트럭이 가득하고 곳곳에서 고가도로와 새 도로를 건설하는 건설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최근 인도 정부는 뉴델리와 뭄바이 공항을 효율적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민간회사에 맡기는 민영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반대하는 공항 노동자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공항부터 도로, 전기까지 인프라 부족은 인도의 고질병으로 인도가 풀지 않을 수 없는 숙제다. 정부 관리들은 자원이 부족하니 민간기업에 맡겨서라도 개발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명한 경제학자인 자야티 고쉬 자와할랄네루대 교수는 인도 정부가 최근 경제발전으로 국가 재정이 풍부해졌는데도 이를 인프라에 효율적으로 투자하지 않고 민영화에만 의존하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관리와 기업들의 부정부패로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최근 2~3년 동안 인도 정부는 일부 지역에서 전력과 상수도를 민영화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선 민간기업들이 수돗물 값을 너무 올려 가난한 이들이 식수를 구하지 못해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거리 한 귀퉁이 공터가 그들의 안마당이었고 얼기설기 줄에 엮인 낡은 천막이 그들의 집이었다. 다시 안마당 한 구석이 그들의 부엌이자 거실이었고 쉼터였다.
어느 옛 왕조의 무덤에 붉게 물든 저문 해가 빛을 씌웠다. 남겨진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오히려 붉은 빛에 조금씩 식혀진다.
정말 인도는 떠오르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다. 도시에서 교육받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젊은이들에겐 부모 세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화려한 삶이 열리고 있다. 4년전쯤 문을 열었다는 뉴델리의 안살플라자는 대표적 쇼핑몰중 하나다. 쇼핑을 마치고 광장에 앉아 있던 샤일자 루드라(21) 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MBA 과정을 마치고 소프트웨어 기업이나 정부에서 일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델리의 새 지하철과 쇼핑몰, 새 건물과 도로, 다리를 봐라. 5년 뒤 뉴델리는 제2의 싱가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미래에 대해 낙관한다. 우리가 인도의 미래니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만만했다. 인도인 친구 자야 바타차르지는 델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페미니스트 출판사인 주반(Zubaan)의 편집자로 일한다. 델리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저녘 초대를 받았다. 자야의 어머니는 델리대 영문과 교수이고, 아버지는 퇴직한 고위 공무원이며, 쌍둥이 오빠와 올케 언니는 인도
자야의 아버지는 일간지 <익스프레스>에 실린 낙살라이트(Naxilite) 기사를 챙겨주면서 인도의 또다른 얼굴을 꼭보라고 하셨다. 낙살라이트는 인도 동북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마오주의 반군들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주의 혁명이론을 기치로, 농촌 지역을 해방구로 만들고 이들 해방구를 넓혀 도시 지역을 포위한 뒤 고사시켜 마오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낙살라이트의 활동은 이미 인도에서 38년 전에 시작된 오랜 문제다. 인도 정부는 대규모 군을 안드라프라데시, 오리사주 등 낙살라이트의 근거지에 파견해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펴고 있다. 인도 마오주의자의 등장은 독립 이후 1948년 농지개혁법이 왜곡되면서 시작됐다. 인도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해 지주로부터 소작농에게 농지를 나눠주려고 했지만 안드라프라데시주의 지주층들은 집권당에 대거 입당해 지주의 기득권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향으로 농지법을 외곡했다. 특히이 과정에서 인도 사회의 최하층으로 아디바시라고도 불리는 부족민(tribal)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의 고통과 불만에 뿌리를 내리고 시작된 낙살라이트의 활동은 가난한 농부와 부락민이 많은 마라하슈트라, 오리사, 비하르주로 차례로 번져갔다. 이들은 67년 뱅골주의 낙살바리(Naxalbari) 마을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여기에서 낙살라이트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인도 정부의 소탕작전에도 불구하고 빈곤문제와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의 활동은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인도 고위 관리들을 인용해 인도의 600개 district(우리나라의 군 단위에 해당) 가운데 4분의 1 이상이 낙살라이트의 직·간접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층 카스트의 지주들도 90년대 중반 이후 무장조직을 결성해 대응하면서 인도 동북부 지역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무력진압보다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실질적 농지개혁을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자야의 어머니는 힌두 근본주의의 위험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1925년 힌두 우월주의자인 헤지와르 박사가 창시해 민족주체회(RSS)는 힌두제일주의 문화단체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농촌 곳곳까지 풀뿌리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사회·문화·경제 곳곳에 깊숙히 파고 들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21세기 인도 정치 아래 숨어 있는 최대 변수로 꼽힌다. 이들은 인도의 주인은 인도 사회와 문화를 건설한 힌두교도이며,인도는 힌두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통일된 교단도 조직도 없는 힌두교를 조직화하려고 노력한다. 1949년 마하트마 간디를암살한 힌두 극단주의자가 이들과 관련돼 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불법단체로 지정돼 활동이 금지됐지만 80년대부터 다시 급격하게 세력을 넓혔다. 90년대말부터 2004년까지 인도를 통치한 인도국민당(BJP)는 RSS와 이념을 같이하는 정치조직이다. 2002년 구자라트에서 일어난 무슬림 학살 사건이나 98년 오리사주에서 일어난 선교사 가족 학살사건 등도 RSS와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야의 어머니는 “힌두 극단주의는 인도 사회의 가장 어두운 모습이며 사악하고 위험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전세계 주요 IT 기업들이 몰려드는 인도, 그들을 매혹시키는 젊은 IT 전문인력부터 21세기판 마오주의자와 힌두교 극단주의까지, 인도는 17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땅이다. 인도 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올해 <이코노미스트:세계대전망>에 인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기고를 하면서 그의 스승의 말을 인용해 인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도에 대해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은 당신이 인도에 대해 정확하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 또한 진실이라는 점이다.” 그는 인도는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인지만, 민주적 권리들은 심각한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인도의 경제가 잘 나가고 있지만 빈곤은 여전히 심각하며, 인도의 교육은 대규모 숙련 노동력을 배출해 냈지만 인구의 3분의 1은 문맹이라는 아이러니는 지적한다. 인도에 대해서는 아무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말할 수 없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인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인도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나무그늘이 그녀의 집에 시원스레 그림자를 드리워주었다. 무더운 오후의 그늘 밑 낮잠 만큼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 |
▲ 차 앞유리 너머의 그는 자꾸 웃기만 했다. 시선 둘 데를 찾는 그는 잠시 뒤 나와 눈을 마주쳤고 목발을 돌려 내게 향했다. |
▲ 수많은 이들의 기도가 담긴 흔적들. 삶은 때론 고통스럽다.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평화를 끌어올려 현세의 고단함을 떠나보낸다. 겹겹이 쌓인 그을인 흔적들. 떠나보낼 고단함은 그 흔적만큼 덜어졌을까. |
▲ “여보게 청년 내 물건 좀 봐주게나” 행상아저씨의 눈빛이 그렇게 말을 하는듯 하다. 표정도 재밌고 앉은 자세는 너무나 편안하다. 속으로 나도 말을 건넸다. “여보게 청년 아저씨 물건 좀 봐주지 그래?” |
▲ 인디아게이트는 델리 라즈뻐트의 동쪽 끝 드넓은 공원에 놓여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1919년 아프간 전쟁 당시 사망한 인도병사 85,000명의 이름이 새겨진 이 건축물은 이젠 연인들을 비롯한 시민, 관광객들의 편안한 휴식처다. 공원을 지키는 회색까마귀들이 주인인 양 활개를 치는 사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
▲ 출근길 전쟁은 예나 인도난 다름이 없다. 위태하게 버스 문틀에 매달린 이들은 노련한 곡예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출발을 외쳤고 버스 안의 사람들은 꽉꽉 구겨진 채 내릴 차례를 기다린다. 잠시 상상한다. ‘그래도 차라리 바깥에 매달리는 게 낫겠구나. 나라면 그래야지.’ |
▲ “왜 자꾸 웃니?” “사진 한 장 찍어줄래요?” “좀전에 찍어 주었잖아.” “이번엔 친구랑 같이요.” 나는 아이에게 폴라로이드 몇 장 던져주었고 아이는 내게 환한 웃음을 던져주었다. 아무리 봐도 아이가 밑질 듯 싶었다. |
▲ 무에 그리 좋을까. 연인들의 대화는 슬쩍 엿들어봤자 간지럽기만 할 뿐이다. 하긴 짐작이 그렇다는 것이지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
▲ 그는 힘들여 페달을 밟았고 나는 육중한 몸을 맡겼다. 질끈 이마를 동여맨 두건은 그의 땀을 가져갔고 릭샤의 뻗뻗한 좌석은 내게 나른함을 주었다. 깡마른 체구의 릭샤꾼은 도착한 뒤 숨을 헐떡였고 나는 그에게 평균가격인 20루피를 주었다. |
▲ 결혼식을 치른 새신부가 붉은 전통의상을 두른 채 힌두사원을 찾았다. 보일듯 말듯 가려진 두건 틈새로 살짝 곱게 화장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참 곱다. |
▲ 하루의 이맘때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저물어가는 하루는 스치듯 작은 기억을 남겨놓고는 묻혀버리고 만다. 미련이 남아 자꾸 셔터를 눌러 시간을 고정시킨다. 하루 어느 시간 어느 순간을 60/1초의 속도로 고정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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